바짝 타들어 가는 모판을 살리기 위해 산골 삼촌과 조카가 헛간에서 꺼내 든 비상 도구 '파래(용두레)'. 그네처럼 흔들며 물을 풀던 전통 농기구의 구조와 가뭄 속 울려 퍼지던 파래 소리의 유래를 전합니다.
코테일 이야기책 듣기
천천히, 이야기의 호흡을 따라 들어보세요.
타들어 가는 모판과 헛간 속 비상 도구
그런데 말이지요, 입동이 코앞인데도 그해 가을 볕은 어찌나 유난스럽고 따갑던지요. 경상북도 안동 북후면 저전마을 들판은 비 한 방울 구경하지 못한 채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애지중지 길러낸 어린 모판마저 누렇게 타들어가니, 농부 덕구는 타는 속을 어디에 비길 수도 없었지요.
“삼촌, 이러다간 며칠 못 가 싹 다 말라 죽겠어요. 저 아래 웅덩이에 물이 조금 남긴 했는데, 논턱이 높아 바가지로는 어림도 없으니 큰일입니다.”
조카 순돌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발을 동동 구르거나 눈을 맞추지 못한 채 땅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평상시 산간마을에서는 잘 꺼내지 않는 물건이지만, 덕구는 더 이상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순돌아, 헛간 뒤편으로 가자. 모판이 다 탈 지경이니 이번엔 비상이다. 파래를 꺼내야겠다.”
글쎄요, 경상도 지방에서는 용두레를 ‘파래’라고 불렀답니다. 평소에는 쓸 일이 드물어도 가뭄이 극심할 때 웅덩이 물을 퍼 올리는 아주 요긴한 농사 연장이었지요. 두 사람은 헛간 구석에서 묵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큼직한 물통과 받침목들을 마당으로 끌어냈습니다.

시무나무 걸개와 서툰 첫걸음
두 사람은 웅덩이 곁 가파른 언덕 아래로 연장을 짊어지고 조심조심 내려왔습니다. 파래는 물을 담아 올리는 길쭉한 물통, 그 통을 그네처럼 매다는 걸개 장치, 그리고 단단히 버텨 줄 설치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순돌아, 이 걸개 나무를 단단히 살펴보아라. 저전마을에서는 단단하고 야문 시무나무로 걸개를 깎아 쓴단다. 통에 물이 가득 차도 쉬이 부러지지 않으려면 이 정도 야무진 나무여야 하거든.”
덕구가 튼튼한 시무나무 걸개 장치를 설치대 삼발이에 끼우고 물통 끈을 단단히 맸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고 묵혀 두었던 탓인지, 통을 살짝 밀어보자 삐거덕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지요.
“삼촌, 제가 힘 하나는 누구에게도 안 지잖습니까. 어서 퍼 올립시다!”
순돌이가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물통 손잡이 끈을 덜컥 움켜쥐고 웅덩이 쪽으로 홱 내리꽂듯 잡아당겼습니다. 그런데 그만 물통이 기우뚱하더니 순돌이의 발이 진흙탕에 미끄러지고 말았지요. 순돌이는 “어어!” 하며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고, 시무나무 걸개 장치는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습니다.

장단을 맞추어야 물이 오른다
“아야야…… 삼촌, 이 통이 제멋대로 겉돌아요. 줄이 끊어지거나 이 시무나무가 부러지는 것 아닙니까?”
순돌이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울상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덕구는 역정을 내는 대신 허허 웃으며 조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지요.
“물 푸는 일은 힘자랑으로 하는 게 아니란다. 파래는 그네를 뛰듯 앞뒤로 부드럽게 흔들어야 물이 담기는 법이야. 물이 있는 곳과 논의 높낮이가 제법 있으니, 서두르면 물통이 뒤집혀 물만 다 쏟아지고 만단다.”
덕구는 물통의 뒤뚱거림을 바로잡은 뒤, 순돌이에게 맞은편 줄을 쥐여 주었습니다.
“삼촌이 메기는 소리에 맞춰 줄을 당겨보거라. 알겠느냐?”
덕구가 먼저 목청을 가다듬고 나지막하게 소리를 메겼습니다.
“헤-야, 파래 물 들어간다!”
순돌이는 숨을 고르며 덕구의 구령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살짝 멋쩍어하면서도 밭은기침을 하고는 소리를 받았지요.
“헤-여, 통 돌아간다!”
메기고 받는 가락이 웅덩이 가에 잔잔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타는 논을 적시는 시원한 물길
참으로 신기하게도 소리에 맞춰 두 사람의 팔과 어깨가 한 몸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시무나무 걸개 장치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고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며 앞뒤로 흔들렸지요. 물통 앞머리가 웅덩이 수면을 미끄러지듯 스치자, 맑은 물이 통 가득 찰랑이며 담겼습니다.
“자, 이제 올린다! 힘을 싣되 채지 말고 쭉 밀어라!”
덕구의 신호에 맞춰 순돌이가 호흡을 길게 내쉬며 줄을 밀어 올렸습니다. 그네처럼 솟구쳐 오른 물통 끝이 언덕 위 논턱을 훌쩍 넘어서는 순간, 통에 담겼던 물줄기가 쏴아 소리를 내며 마른 논바닥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다! 삼촌, 물이 논으로 콸콸 흘러 들어가요!”
순돌이의 얼굴에 땀방울과 흙탕물이 범벅이 되었지만, 입가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습니다. 갈라진 흙 틈으로 물길이 잦아들며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모판의 뿌리를 촉촉하게 감싸 안았지요.
“그렇지, 그렇게 메기고 받는 게야. 서두르지 않아도 소리 맞춰 흔들다 보면 어느새 논이 다 차는 법이란다.”
두 사람은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치며 다시 구성진 파래 소리를 이어갔고, 마침내 타는 가뭄 속에서도 저전마을 논둑길에는 시원한 물소리가 가득 찼답니다.

용두레의 정의와 구조
용두레는 얕은 곳에 있는 물을 약간 언덕진 높은 곳의 논으로 푸는 데 사용하는 전통 농사 연장입니다. 물을 담아 푸는 통을 그네처럼 매달아 놓고 흔들면서 물을 푸는 방식을 사용하므로, 물이 있는 곳과 논의 높낮이 차가 큰 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구조는 크게 물통, 걸개 장치, 설치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역별 명칭과 사용 양상
용두레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과 쓰임새를 보입니다. 전남 영광 지역에서는 용두레를 ‘통두레’라고 부르며, 경상도와 강원도 등지에서는 ‘파래’라고 부릅니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용두레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반대로 서해안 지역에서는 파래라는 명칭을 알지 못합니다.
인천 강화도나 전북 김제 등의 저지대 평야지역에서는 현대식 관개수리시설이 갖추어지기 전까지 용두레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반면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저전마을 같은 산간지역에서는 평상시에 잘 사용하지 않다가, 가뭄이 심해 모판이 탈 정도가 되었을 때 비상시로 파래를 사용하여 웅덩이 물을 푸는 예가 있었습니다. 또한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저전마을에서는 걸개 장치의 재료로 재질이 단단하고 야문 시무나무를 전통적으로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물 푸는 소리와 지역별 전승
용두레를 이용하여 물을 풀 때 농부들은 메기고 받는 형식의 물 푸는 소리를 함께 불렀습니다. 지역에 따라 경북 안동시 북후면 저전마을의 ‘파래 소리’, 경기도 안산 지역의 ‘용두레질 소리(물 품는 소리)’, 강화도 교동면의 숫자를 헤아리는 셈 소리, 내가면의 달거리 형식의 소리 등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 중 강화도의 용두레질 소리는 2003년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대 수리시설의 발달과 용두레의 변화
전기 모터나 양수기 등 현대식 수리시설이 발달하고 보급되면서, 인력에 의존해 물을 푸던 도구인 용두레는 점차 농경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일상적인 농업 현장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전통 민속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강화도의 용두레질 소리가 2003년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는 등 우리 민속 문화의 중요한 자산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창작 서사와 역사·민속 사실의 경계 안내
본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가을 가뭄 속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생활 소동, 주고받는 대화 등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창작된 허구입니다. 다만 파래(용두레)의 구조가 물통·걸개 장치·설치대로 이루어진 점, 안동 저전마을 등 산간지역에서 가뭄 시 비상 도구로 파래를 꺼내 썼다는 전승, 걸개 장치 재료로 단단한 시무나무를 사용한 점, 그리고 메기고 받는 형식의 파래 소리와 용두레질 소리 등은 모두 역사 및 민속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