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대목을 앞두고 고된 마늘 까기에 어깨가 뻐근하던 날, 마당에 흩어진 화투짝을 보며 터져 나온 순이의 노랫가락이 온 마을의 웃음이 된 사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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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앞마당의 분주한 한숨
가을볕이 마당 가득 따갑게 내리쬐던 날이었지요. 추석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경남 밀양의 어느 마을 마당에는 아침 일찍부터 동네 아낙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멍석 위에는 붉은 고추가 널려 있고, 그 곁으로는 산더미처럼 쌓인 통마늘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순이는 쪼그려 앉아 부지런히 마늘 쪽을 깠습니다. 손끝은 이미 아리고 매운 기운에 벌겋게 물들어 있었지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마늘을 다 다듬고 고추까지 갈무리해야 하는데, 손을 아무리 놀려도 일거리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답니다.
“아이고, 허리야. 볕은 벌써 저만치 기울어가는데 아직도 한 광주리가 그대로 남았네.”
순이가 뻐근한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나직이 탄식을 내뱉자, 곁에서 고추를 뒤집던 분이네 어머님이 땀방울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순이 댁, 벌써 지치면 어쩌누. 오늘 해 지기 전에는 다 끝내놓기로 약속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보세.”
말은 그렇게 건넸지만 분이네 어머님의 목소리에도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습니다. 식민지 시절의 각박한 살림살이에 명절이라도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두 배는 더 헛헛해지곤 하던 시절이었지요.

툇마루 구석에 흩어진 딱지들
잠시 굳은 어깨를 펴던 순이의 시선이 마당 한구석 툇마루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명절이나 상갓집에서 어른들이 오락으로 흔히 쓰던 화투짝 마흔여덟 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지요. 누군가 노름을 하다 말고 던져둔 붉은 등판의 종이 딱지들이었습니다.
“쯧쯧, 노름질에 넋이 빠져선 저 딱지들을 아무렇게나 팽개쳐 뒀네. 다 부질없는 짓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순이가 혀를 차며 말하자, 마늘 껍질을 쓸어 담던 분이네 어머님이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어쩌겠나. 사는 게 하도 막막하고 허무하니, 요행이라도 바라는 마음에 저 붉고 검은 딱지나 붙들고 밤을 새우는 게지. 이기고 지는 다툼에 매달려 봐야 손에 쥐는 건 한숨뿐인데 말일세.”
순이는 툇마루에 널린 그림들을 찬찬히 뜯어보았습니다. 소나무에 학이 앉은 정월부터, 매화와 벚꽃, 국화와 단풍까지 열두 달을 가리키는 그림들이 제각기 짝을 지어 흩어져 있었지요. 허무한 세상살이에 저 작은 종이짝을 만지작거리며 속을 태우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순이의 가슴속에서도 헛헛한 감정이 차올랐습니다.
‘그렇다고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지.’
순이는 마늘을 쥐고 있던 손을 털고 일어나 툇마루로 성큼 다가갔습니다. 흩어진 패를 하나둘 모아 쥐며, 순이의 눈빛에 장난기가 어리기 시작했답니다.

속속한 마음을 실은 타령 한 가락
순이는 마흔여덟 장의 화투를 마당 멍석 귀퉁이에 가지런히 놓으며 목청을 가다듬었습니다. 끝도 안 보이는 일거리에 축 처진 이웃들의 기운을 북돋워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순이가 4음보의 박자에 맞춰 나지막이 소리를 띄웠습니다.
“정월 솔가지 속속헌 마음, 이월 매조 다 맺어놓고!”
낭랑하게 울리는 구성진 목소리에 마늘을 까던 아낙들의 손길이 뚝 멈추었습니다. 분이네 어머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순이를 바라보았지요.
“순이 댁, 그게 무슨 소리인가? 화투짝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겐가?”
“어머님, 일만 하다간 허리만 끊어지겠어요. 이왕 할 일, 저 딱지 속 그림이나 입으로 놀려가며 시름을 털어내야지요!”
순이는 환하게 웃으며 곧바로 다음 구절을 이어 불렀습니다.
“삼월 사꾸라 산란한 마음, 사월 흑사리 흣쳐놓고!”
화투 속 꽃과 새를 빗대어 사람의 어지러운 속마음을 털어내는 재치 있는 사설에 분이네 어머님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습니다. 마늘 찧던 방망이를 쥔 손이 자기도 모르게 멍석 바닥을 톡, 톡 치며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지요.
“옳지, 사월 흑사리처럼 속 시끄러운 근심일랑 마당에 확 흩어버려야지! 자, 어서 다음 달도 풀어보게!”

멍석 위에 피어난 웃음꽃
흥이 오른 순이는 오월 난초 그림을 훌쩍 집어 올리며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오월 난초 나비가 되어, 유월 목단에 춤 잘 추네!”
순이가 양팔을 나비처럼 너울너울 저으며 익살맞은 몸짓을 섞자, 마늘 껍질을 치우던 처녀 아이 하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쉬던 이웃들도 손뼉을 짝, 짝 치며 소리를 돋우었지요.
“칠월 홍돼지 홀로 누워, 팔월산에 달이 뜬다!”
“그렇지! 팔월 한가위 달이 저 산 위에 둥실 뜰 테니 우리도 얼른 일 끝내고 달맞이나 가세!”
분이네 어머님이 추임새를 힘차게 넣었습니다. 단순한 노름 도구로 여겼던 딱지 그림들이 순이의 입을 거치며 고된 노동을 달래는 신명 나는 사설로 뒤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삶이 팍팍하다고 한탄만 하던 얼굴들 위로 가을볕보다 따뜻한 웃음이 환하게 피어올랐지요.
“구월 국화 굳은 한 맘이, 시월 단풍에 뚝 떨어지고!”
단풍잎 떨어지듯 손을 툭 떨구는 순이의 시늉에 온 마당은 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기고 지는 다툼에 눈을 붉히던 노름판의 그늘은 어느새 간데없고, 한데 모여 고단을 나누는 이웃들의 끈끈한 정만 마당에 그득했습니다.

열두 달 시름을 넘기고
마침내 한 해의 끝자락에 닿았습니다. 순이는 마지막 남은 패를 마당 하늘 위로 번쩍 치켜들며 목청껏 소리를 맺었지요.
“동짓달 오동달은, 열두 비를 넘어가네!”
“넘어가네, 얼씨구! 온갖 궂은비 다 넘어가네!”
마당에 둘러앉은 아낙들이 한목소리로 노래의 꼬리를 받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어둡고 허무한 시절이었지만, 열두 달의 온갖 비바람과 시름도 이 노래 한 가락으로 너끈히 넘겨버리겠다는 굳센 마음들이 모인 것이었지요.
노래가 끝나자 신기하게도 무겁던 손놀림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습니다. 순이와 분이네 어머님, 그리고 이웃들은 흥얼흥얼 가사를 되새기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물들일 무렵에는 마늘 까기와 고추 널기를 깔끔하게 끝마칠 수 있었답니다.
“순이 댁 덕분에 오늘 지겨운 줄도 모르고 명절 준비를 마쳤네. 저 몹쓸 노름 딱지로 이런 기막힌 노래를 부를 줄 누가 알았겠나.”
분이네 어머님이 깨끗이 비워진 광주리를 챙기며 순이의 손을 따뜻하게 꼭 쥐어주었습니다. 툇마루의 화투짝은 단정히 개켜져 주머니에 들어갔고, 멍석을 걷는 아낙들의 발걸음은 저물어가는 가을 노을 속으로 한결 가볍고 홀가분하게 이어졌답니다.

화투타령은 노름의 도구인 화투를 소재로 하여 부르는 유희요(도구유희요이자 음영민요)입니다. 행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생각을 드러내며, 이기고 지거나 잘하고 못하는 등의 다툼이나 경쟁의식이 개입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4음보로 5·4조가 주조를 이루며, 정월에서 섣달에 이르기까지 열두 달에 따른 화투의 특성을 노래하는 월령체가 민요입니다. 화투는 12종류 48장으로 되어 있는 놀이용 딱지로서 각 월에 해당하는 그림이 네 장씩 짝을 이루고 있으며, 주로 추석과 설날의 명절이나 상갓집 등에서 오락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화투타령은 근대에 생성되어 일제강점기 때부터 많이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 화투의 조선 유입 시기와 경로에 관하여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가져왔다는 설과 19세기 말 대마도의 일본 상인들이 항구를 통해 조선에 퍼뜨렸다는 설이 공존합니다. 경남 밀양 지역에서는 ‘정월 솔가지 속속헌 마음 이월 매조 다맺어놓고/ 삼월 사꾸라 산란한 마음 사월 흑사리 흣쳐놓고/ 오월 난초 나비가 되어 유월 목단에 춤 잘 추네/ 칠월 홍돼지 홀로 누워 팔월산에 달이 뜬다/ 구월 국화 굳은 한 맘이 시월 단풍에 뚝 떨어지고/ 동짓달 오동달은 열두 비를 넘어가네’와 같은 사설이 채록되어 전해집니다.
화투의 그림을 월별에 따라 해학적으로 풀이한 달거리식 노래, 곧 월령체가는 최근까지 전국 곳곳에서 많이 불렀습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백성의 허무한 삶과 무력감을 달래며 전승되어 온 민요의 모습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구비 전승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명절 앞마당의 마늘 까기와 고추 널기, 순이와 분이네 어머님의 구체적인 대화와 행동, 그리고 화투타령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나누는 서사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허구적 창작입니다.
실제 역사적·민속적 사실은 화투가 12종류 48장의 오락 도구로 명절이나 상갓집 등에서 쓰였다는 점, 그리고 이를 소재로 열두 달의 특성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4음보 5·4조의 월령체 민요인 ‘화투타령’이 존재하며 경남 밀양 등지에서 관련 사설이 채록되어 전해진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