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달, 갓 시집온 새댁 분이가 서툰 솜씨로 버선을 짓던 기나긴 밤의 이야기와 음력 11월의 세시풍속을 전합니다.
코테일 이야기책 듣기
천천히, 이야기의 호흡을 따라 들어보세요.
기나긴 동짓달 밤, 꺼지지 않는 등잔불
음력 11월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는 동지가 든 달이지요. 문풍지를 치는 바람소리가 유독 잦아드는 깊은 밤, 온 동네가 깊은 잠에 빠졌건만 분이의 방 등잔불만은 홀로 가물가물 타고 있었답니다.
올가을 이 집으로 갓 시집온 새댁 분이에게는 꼭 지키고 싶은 다짐이 있었어요. 새로 출가한 며느리가 시부모님께 버선을 지어 올린다는 ‘동지헌말’의 약속 말입니다.
“어머님 발은 곱고 갸름하시니 날렵하게 짓고, 아버님 발은 밭일로 굳으셨으니 조금 넉넉하게 잡아야 할 텐데……”
낮동안 눈치껏 재어 둔 발치수를 떠올리며 무명천을 매만지는 분이의 손길이 조심스러웠지요.

쏟아지는 졸음과 삐뚤빼뚤한 바늘땀
하지만 바느질이란 마음만 앞선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지요. 밤은 깊어만 가고 등잔불이 깜빡거릴 무렵, 쏟아지는 졸음이 분이의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눌렀습니다.
“안 돼, 여기서 눈을 감으면 날이 새고 말아요.”
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손끝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지요. 고운 일자여야 할 바늘땀은 지그재그로 어긋나고, 뒤꿈치 감침질은 뭉툭하게 뭉쳐 버선코가 엉뚱한 곳을 향해 홱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이고, 이걸 어쩌면 좋아. 이 꼴로 아침상에 올렸다간 어른들 뵐 낯이 없겠네.”
분이턴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렀답니다. 첫인사로 올릴 정성스러운 물건이 엉망이 되었으니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요.

문풍지 너머 찾아온 끝순네의 웃음소리
그날은 조금 달랐지요. 그때 사립문 쪽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가 나더니, 옆집 끝순네 할머니가 조심스레 창호지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새댁, 아직도 불을 켜두었네 그려? 자나 안 자나 궁금해서 슬쩍 와봤지.”
분이는 깜짝 놀라 삐뚤어진 버선을 얼른 치맛자락 밑으로 슥 숨기며 문을 열었습니다.
“어머, 끝순네 할머님. 이 야심한 시각에 웬일이셔요?”
끝순네는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작은 사기그릇을 쑥 내밀며 껄껄 웃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쑬 팥을 삶아두다 달큼한 팥물이 잘 우러났기에 맛이나 보라고 가져왔지.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잔병치레도 없다지만, 새댁처럼 밤을 새워 눈이 퀭하면 귀신도 놀라 달아나겠소. 너무 욕심내지 말고 숨을 고르며 하구려.”
분이의 빨개진 얼굴을 본 끝순네는 더 묻지 않고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그 따스한 손길에 분이는 굳었던 어깨가 스르르 풀렸지요.

새벽을 재촉하는 작은 실수
끝순네가 돌아간 뒤, 방 안에는 다시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았습니다. 먼 산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분이의 마음이 급해졌지요.
“어머님 것만이라도 먼저 온전하게 끝내야 해.”
서둘러 바늘을 놀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답니다. 앗,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날카로운 바늘끝이 분이의 검지손가락을 콕 찔렀습니다.
“아야…….”
새빨간 핏방울이 하얀 무명천에 톡 떨어지려 하자, 분이는 황급히 입술로 손가락을 꾹 깨물었습니다. 천이 더럽혀질까 봐 아픔보다 걱정이 앞섰던 것입니다. 피곤함과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눈가가 왈칵 뜨거워졌지요.

문이 열리고 나타난 그림자
바로 그때였습니다. 마루 바닥이 삐걱이더니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에헴, 하는 낮고 굵은 목소리는 틀림없는 시아버지였지요.
분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평소 엄하고 말수가 적어 늘 조심스럽던 어른이었으니까요.
“새아가, 아직 불을 밝히고 있느냐.”
“아, 아버님……!”
분이가 바느질감을 급히 등 뒤로 감추며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을 새도 없이, 방 문이 스르륵 열렸습니다. 찬 바람과 함께 성큼 들어선 시아버지는 등잔을 높이 들고 분이를 내려다보셨지요. 늦은 밤까지 잠을 안 자고 뭐 하냐 호통을 치실까 봐 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들바들 떨었답니다.
품속에서 나온 짝짝이 버선
하지만 예상했던 호통 대신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시아버지는 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두툼한 두루마기 품 안으로 굵직한 손을 쑥 집어넣으셨지요.
“이걸 받아보거라.”
시아버지가 쑥스러운 기색으로 방바닥에 툭 내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하얀 버선 한 켤레였습니다. 분이는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이며 그것을 집어 들었지요.
자세히 보니 참으로 기이한 모양새였습니다. 한쪽은 어른 발만큼 큼직한데 다른 쪽은 아이 발처럼 짤막했고, 솔기는 굵은 실로 듬성듬성 꿰매져 있었지요. 버선코는 하늘로 솟구치다 옆으로 꺾여 있었습니다.
“아버님, 이것이…… 대체 웬 버선인지요?”
분이의 물음에 시아버지는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헛기침만 캑캑 뱉어냈습니다.

밝혀진 서툰 배려의 진실
“음…… 동지헌말이라 하여 며느리가 오면 버선을 짓느라 애를 먹는다지 않더냐. 시에미 성화에 네 손이 부르틀까 싶어, 내 며칠 전부터 광구석에서 몰래 연습을 해보았다. 헌데 이놈의 헝겊이 도통 말을 들어먹질 않더구나.”
바위처럼 무뚝뚝하던 시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으로 뜻밖이었답니다. 며느리가 겪을 고생을 덜어주려고, 거친 농사일만 하던 투박한 손으로 몰래 바늘을 쥐고 끙끙 앓으셨던 것이지요.
“내 발로 밟고 다닐 물건이니 꼴이 좀 사나우면 어떠냐. 네가 밤잠을 설쳐가며 애태울 것 없다. 대충 꿰매어 두고 어서 자거라.”
그 퉁명스러운 말투 뒤에 담긴 깊은 진심을 마주하자, 분이의 가슴속에 차가운 바람 대신 뜨끈한 온기가 왈칵 차올랐습니다. 시아버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도 바늘에 찔려 거뭇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지요.
마주 앉아 다듬는 다정한 바늘땀
분이는 등 뒤에 감추어 두었던 제 삐뚤빼뚤한 버선을 슬그머니 꺼내 놓았습니다.
“아버님, 실은 저도…… 솜씨가 모자라 버선코를 이리 엉망으로 쥐어박고 말았습니다.”
분이의 버선과 시아버지의 짝짝이 버선이 나란히 놓이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방 안을 짓누르던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졌지요.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씀드리길 참 잘했습니다. 아버님, 이왕 이렇게 된 것 제가 아버님의 엉성한 솔기를 손봐 드릴 테니, 아버님께선 천을 팽팽하게 잡아주시겠어요?”
“허허, 그러마. 둘이 힘을 합치면 동지 밤이 아무리 길어도 이겨내겠지.”
분이는 혼자 앓던 부끄러움을 털어내고, 시아버지와 마주 앉아 다정하게 바늘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의 손길이 오갈수록 비뚤었던 바늘땀은 단단하고 고른 자국으로 예쁘게 채워져 갔답니다.
동짓날 아침, 온 동네로 번진 훈훈한 온기
어느덧 먼동이 터오며 동짓날의 아침 해가 환하게 떠올랐습니다. 비록 바늘땀은 조금 울퉁불퉁할지언정, 밤새 온 마음을 담아 매만진 버선 두 켤레가 단정하게 상 위에 놓였지요. 버선을 받아 든 시어머니는 사연을 전해 듣고 눈시울을 붉히며 분이의 두 손을 따뜻이 감싸 쥐었습니다.
이윽고 부엌 가마솥에서는 찹쌀 새알심을 둥둥 띄운 붉은 팥죽이 구수하게 끓어올랐지요. 분이는 큰 그릇마다 팥죽을 넉넉히 퍼 담아 옆집 끝순네를 비롯한 이웃들에게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끝순네 할머님, 밤새 염려해 주신 덕에 버선을 무사히 올렸습니다. 따뜻한 팥죽 한 그릇 드셔요.”
“새댁 얼굴이 아침볕처럼 환하네! 이 집 버선 소문이 벌써 담장을 넘었소.”
삐뚤빼뚤한 버선 한 켤레로 시작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다정한 온기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팥죽 그릇을 타고 마을 고샅길마다 따스하게 번져 나갔답니다.

음력 11월 동짓달과 절기 ‘동지’
음력 11월은 동짓달을 비롯하여 지월(至月), 중동(仲冬), 자월(子月), 창월(暢月), 고월(辜月), 황종(黃鍾), 복월(復月), 양복(陽復)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일컬어집니다. 이 시기에 드는 동지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로, 북반구에서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궁중과 민간의 세시풍속 및 의례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이듬해 달력을 만들어 진상하면 임금이 황장력과 백장력에 어새를 찍어 관원에게 나누어 주었고, 아전이 벼슬한 집에 청장력을 바치는 하선동력 풍속이 있었습니다. 또한 동짓달에는 청어와 귤, 유자, 황귤 등을 종묘에 천신하였으며, 탐라의 성주가 귤을 바칠 때 치하하는 뜻으로 태학와 사학의 유생들에게 황감제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고려시대 중동에는 거국적인 행사로 팔관회가 베풀어져 신년의례 겸 토속신에 대한 예축의례로 치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민간에서는 중국 한대에서 비롯되어 새로 출가한 부인이 시부모에게 버선을 바치는 ‘동지헌말’ 풍속이 전해졌습니다.
동지의 음식과 금기, 지역별 차이
동지에는 팥을 삶아 으깨어 체에 걸러 팥물에 찹쌀이나 수수쌀로 만든 단자(새알, 새알심, 새심이, 옹생이, 옹심이 등)를 넣어 쑨 팥죽을 먹었습니다. 팥죽을 먹으면 겨울에 감기에 걸리지 않고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으며, 세 집을 돌며 얻어먹으면 장수하고 새알심을 많이 먹으면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믿었습니다. 육계, 산초, 당밀을 쇠가죽을 이용하여 삶아 응고시켜 만든 약인 ‘전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동짓날 밤 부부간의 방사를 하면 잡귀가 시기하여 남자가 급사하거나 액운이 닥친다고 믿어 방사를 금기시했습니다. 동지는 애동지, 중동지, 노동지로 나뉘며 지방에 따라 팥죽을 쑤어 먹는 여부나 대체 음식(팥시루떡, 녹두죽 등)에 차이가 있습니다. 아울러 경상도 및 울산·부산 일부 지역의 방사 금지, 경북 울진의 바가지 금기, 전라도 고드름 금기, 충북 옥천·괴산의 잡귀 쫓기 및 수수 화살 쏘기, 경남 밀양의 메밀껍질 베개 등 지역별로 다양한 속신과 금기가 전해집니다.
제공된 사실 근거(S01)에는 음력 11월과 동지 관련 전통 풍속이 오늘날 어떻게 전승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현대 생존 자료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참고한 이야기 자료에 등장하는 새댁 분이의 바느질 일화, 시아버지의 서툰 버선 짓기, 이웃 끝순네의 팥물 나눔 등은 문학적 창작 및 허구적 서사에 해당합니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나 전통문화 사실이 아니며, 허구 경계에 따라 창작 요소를 실제 문화 사실로 오인하지 않도록 구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