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 불길을 잘못 다스려 진득하게 졸아버린 엿물에서 우연히 탄생한 산골 청년 봉구의 엿탁주와 백두대간 토속주의 자취를 담았습니다.
산비탈의 옥수수와 부엌의 맷돌 소리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자락을 병풍처럼 두른 강원도 산골 마을은 말이지요, 벼농사를 짓기 어려운 땅이라 옥수수와 감자가 삶의 든든한 밑천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찬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늦가을이면, 산간 토착민들은 한 해 동안 땀 흘려 거둔 잡곡에 엿기름을 섞어 귀한 엿탁주를 빚어내곤 했지요.
그날 아침, 마을 청년 봉구는 동네 어르신들과 농사일을 거들어준 이웃들에게 대접할 탁주를 손수 빚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덜컹거리는 맷돌에 노란 옥수수 알갱이를 넣고 엿기름과 함께 곱게 갈아내자, 풋풋하면서도 구수한 곡식 냄새가 작은 부엌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봉구는 큰 가마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갈아낸 곡물을 쏟아부은 뒤, 부뚜막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마른 솔가지를 아궁이에 밀어 넣었지요.
“곡물을 푹 삭여서 달디단 물을 뽑아내야 맑은 청주도 뜨고 농사일 나눌 탁주도 거르는 법인데…… 오늘은 손이 좀 서툴러도 더 정성을 쏟아야겠어.”
봉구는 솥뚜껑 틈으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달콤한 김을 바라보며 연신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궁이에서 너무 졸아든 엿물
그런데 참, 장작불이란 것이 늘 사람 마음 같지가 않지요. 잠시 마당에 널어둔 멍석을 챙기러 나갔던 사이, 부엌으로 돌아온 봉구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궁이 속 참나무 장작이 시뻘건 불꽃을 뿜어내며 솥을 거세게 달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쿠, 이게 무슨 냄새람!”
놀란 봉구가 헐레벌떡 솥뚜껑을 열어젖히자, 훅 뿜어져 나오는 열기 속에서 짙은 조청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바글바글 부드럽게 삭아야 할 당화액이 센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엿가락처럼 걸쭉하게 졸아들어 주걱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버렸지요.
“큰일 났네. 맑은 물이 돌아야 용수를 박아 맑은 청주를 떠내고, 물을 타서 탁주를 걸러낼 텐데…… 이 끈적한 걸 어찌 거른단 말인가?”
주걱을 쥔 봉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버리기엔 아까운 옥수수였고, 그대로 두기엔 술밑으로 삼기에 너무나 진하고 무거운 엿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막례 할머니의 뜻밖의 귀띔
마당에서 풀이 죽어 솥바닥만 긁적이고 있을 때였답니다. 마침 사립문을 열고 이웃집 막례 할머니가 들어섰지요. 솥 안을 빤히 들여다보던 할머니의 눈썹이 잘게 실룩거렸습니다.
“봉구야, 솥 안에 엿을 고아 호박엿 장수를 하려는 게냐, 아니면 술을 빚으려는 게냐?”
“할머니, 불길이 하도 세서 그만 물이 다 졸아들었습니다. 용수를 박아도 맑은 술이 괼 리 만무하고, 물을 타 거르려 해도 체에 죄다 엉겨 붙을 판이니 다 버려야 할까 봅니다.”
봉구가 울상을 짓자 할머니는 솥 안에 묻은 끈적한 단물을 손끝으로 콕 찍어 맛을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혀를 차기는커녕 껄껄 웃음을 터뜨렸지요.
“아깝게 귀한 옥수수를 왜 버려? 산골에선 곡식 한 톨도 허투루 굴리지 않는 법이다. 식혀서 미지근해지거든 곱게 빻은 누룩을 넉넉히 버무려 술독에 안쳐 보려무나. 걸쭉한 엿물 그대로 덧술을 쳐 삭이면,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옹골찬 맛이 날지도 모를 일이지.”
봉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할머니의 말대로 걸쭉하게 식은 엿물에 누룩을 섞어 조심스럽게 오지항아리에 담았습니다.

술독 속에서 일어난 은밀한 변화
술독을 아랫목 따뜻한 구석에 모셔두고 짚북데기로 감싸 안친 뒤 며칠이 흘렀습니다. 봉구는 혹여 쉰내가 나거나 그대로 굳어버리지 않았을까 가슴을 졸이며 매일같이 독 곁을 서성였지요.
이윽고 약속한 날 아침, 봉구는 조심스럽게 한지로 봉한 항아리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훅 하고 풍겨오는 냄새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텁텁하거나 시큼한 냄새가 아니라, 코끝을 톡 쏘는 알싸한 기운 뒤로 진한 조청의 단내가 부드럽게 감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심스레 바가지로 술을 떠 올리니 누런 옥수수 빛깔의 묵직한 탁주가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한 모금 살짝 입술을 적셔본 봉구는 눈을 크게 떴답니다. 일반 막걸리보다 알코올 기운이 묵직하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도, 뒤끝에는 엿처럼 끈끈하고 달콤한 맛이 혀에 착 감겼기 때문입니다.
“아, 실패인 줄만 알았는데…… 불에 바짝 졸아든 엿물이 이런 진한 맛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비록 제사에 올릴 맑고 투명한 청주를 넉넉히 떠내지는 못했지만, 덧술을 쳐 익힌 이 탁주는 그 자체로 놀라운 기운을 품고 있었습니다.

마루 끝에 번지는 달콤한 여운
그날 오후, 비탈진 밭에서 돌을 고르고 나무를 베느라 녹초가 된 마을 일꾼들이 봉구네 집 마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흙먼지를 털어내는 이들의 어깨는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지요. 봉구는 큰 양푼에 시원한 샘물을 알맞게 타서 걸러낸 진한 탁주를 바가지 가득 담아 마루로 날랐습니다.
“봉구야, 색이 꽤 진하구나? 어디 맛이나 보자.”
한 일꾼이 투박한 사발을 받아 꿀꺽꿀꺽 들이켰습니다. 사발을 내려놓자마자 그의 거친 수염 사이로 헛기침과 함께 감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허어, 요것 봐라! 첫 모금은 속이 찌릿할 만큼 독한데, 뒷맛은 꼭 장날 사 먹던 가락엿처럼 달디달구나! 다리에 힘이 번쩍 솟는 것 같네!”
마당에 둘러앉은 일꾼들이 너도나도 사발을 부딪치며 껄껄 웃었습니다. 봉구는 마루 한구석에서 빙그레 웃고 있는 막례 할머니를 바라보며 조용히 잔을 올렸지요. 가파른 산자락에서 거친 잡곡을 일구며 살아가는 산골 사람들에게, 아궁이 불길의 실수마저 품어 안은 이 달콤하고 진한 엿탁주 한 사발은 고된 하루를 달래주는 더없이 따스한 위로였답니다.

엿탁주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정선과 태백, 경상북도 봉화 등 고산간지역에서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등 잡곡과 엿기름을 주원료로 하여 빚은, 알코올 도수가 높고 단맛이 나는 토속주입니다. 벼농사보다는 옥수수와 감자 등 산작물이 근간을 이루던 산간 토착민들의 삶 속에서 개발된 가장 토속적인 술로 평가되며, 맥아를 이용한 당화법을 차용한 양주 기술을 보여주어 우리나라 양주 기술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엿탁주는 옛 문헌에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근대 발간물인 『한국민속대관』, 『한국의 전통민속주』, 『명가명주』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원료에 따라 옥수수술, 감자술, 수수술 등으로도 불리며, 대개 덧술을 한 엿탁주를 만든 뒤 용수를 박아 뜬 청주는 제사와 손님 접대에 쓰고, 물을 타서 거른 탁주는 농사일을 하면서 나누어 마시는 용도별 음용 관습이 전해집니다.
지역별로 다양한 제조법과 명칭이 전해지는데, 홍천의 옥선주는 옥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소주이며, 춘천의 한옥로주는 찹쌀과 누룩으로 만든 밑술에 옥수수 당화액을 섞어 숙성합니다. 원주 엿술은 황골엿 제조 과정에서 불에 구운 누룩과 고두밥을 섞어 빚으며, 울릉도 엿탁주는 멥쌀과 생감자 밑술에 옥수수·엿기름가루 덧술을 더해 하루 한나절 만에 익힙니다. 강릉의 청주는 찹쌀고두밥 당화액과 생솔잎을 넣어 찐 고두밥을 망사자루에 담아 엿물에 담그는 방식으로 빚습니다.
오늘날에도 강원도 일원에서는 홍천의 옥선주, 삼척의 옥수수동동주, 춘천의 한옥로주, 원주의 엿술, 강릉의 청주 등 다양한 주품이 전해지며 산간 지역 고유의 양조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청년 봉구의 아궁이 불조절 실수나 막례 할머니의 조언 등 세부 일화는 이야기 형성을 위해 창작된 허구입니다. 다만 엿탁주가 백두대간 고산간지역에서 잡곡과 엿기름을 활용해 빚은 단맛과 높은 도수의 토속주라는 점, 청주와 탁주를 용도에 따라 나누어 마신 관습, 그리고 강원도 일원에 다양한 지역별 주품이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민속적 사실에 근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