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정월 초하루, 쌀과 초를 챙겨 만신집을 찾은 분이의 이야기와 한 해 열두 달의 액운을 막던 전통 풍속 '홍수맥이'의 의미를 만납니다.
코테일 이야기책 듣기
천천히, 이야기의 호흡을 따라 들어보세요.
찬 바람을 가르고 나선 이른 아침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루 아침, 마을 어귀는 아직 희끄무레한 안개에 싸여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설빔을 차려입고 떡국 냄새를 피워 올릴 무렵이었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분이는 그보다 훨씬 이른 새벽부터 얼음장 같은 샘물에 손을 씻고 정갈하게 목욕재계를 마친 참이었답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한 해 동안 큰 탈 없이 무탈하기만을 빌기 마련이지요. 옛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뜻밖에 닥쳐올지 모를 궂은일이나 액운을 ‘횡수’라 부르고, 이를 미리 막아내는 작은 의례를 ‘홍수맥이’라 불렀답니다. 대개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는 이렇게 만신을 찾아가 한 해의 평안을 비는 풍습이 있었지요.
“여보, 보따리는 다 챙겼소? 쌀이 새지 않게 단단히 묶었는지 봐요.”
남편의 목소리에 분이는 보자기를 다시 여며 쥐었습니다. 정성스레 씻어 말린 쌀 한 되박, 은은한 불을 밝힐 초와 향, 맑게 빚은 막걸리 한 병, 그리고 소액의 금전이 들어 있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집안의 가장 깨끗한 것들만 골라 담은 길이었지요.
“네, 걱정 마셔요. 아이들 사주도 적바림해 품에 넣었으니 어서 다녀올게요.”
분이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만신집을 향해 종종걸음을 놓았습니다. 정월의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식구들의 무탈함을 바라는 마음에 발걸음만큼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답니다.

만신집 안방에 모인 정성
만신집 사립짝을 밀고 들어서자 마당 안쪽에서 맑은 방울 소리가 짤랑거리며 울렸습니다.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동안은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홍수맥이를 하러 줄을 잇는 때였지요. 방 안에서는 은은한 향내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분이 어머니 오셨구려. 찬바람에 손이 곱았겠습니다. 어서 아랫목으로 들어앉으세요.”
만신은 분이의 시린 손을 보더니 따뜻한 방구들을 내어주었습니다. 분이는 숨을 고르고 품에 안고 온 보따리를 조심스럽게 풀었습니다. 뽀얀 쌀됫박 위에 초와 향을 얹고, 막걸리 병을 가지런히 세운 뒤 소액의 금전을 곁에 놓았지요.
“새해 첫날부터 찾아와 번거롭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그저 우리 집 양반 밖엣일 순탄하고, 아이들 잔병치레나 없이 넘어가면 바랄 것이 없겠어요.”
분이가 두 손을 곱게 모아 쥐며 말하자, 만신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새해 첫 아침에 가족들 액을 막겠다고 어미가 이 정성을 들여 걸어왔는데, 어찌 허투루 빌겠습니까. 자, 식구들 이름과 난 날부터 차근차근 일러주시오.”
만신은 붓을 들어 정갈한 백지 위에 분이가 읊는 식구들의 성명과 생년월일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방 안에는 종이 위를 스치는 붓끝 소리와 엄숙한 정적이 함께 내려앉았지요.

생년월일에 담긴 한 해의 길흉
종이를 앞에 둔 만신이 가볍게 옥수를 올리고 신당을 향해 절을 올렸습니다. 그러고는 분이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직하게 청하며 한 해에 닥쳐올 좋은 일과 궂은일을 짚어내는 공수를 내리기 시작했지요.
“올해는 집안에 볕이 들 때도 있겠으나, 뜻밖의 횡수가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매달 삼가야 할 일이 있소.”
만신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분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횡수라 하시면…… 험한 일이라도 생긴다는 말씀인가요?”
놀란 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만신은 방울을 짚던 손을 멈추고 온화한 눈빛으로 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겁먹을 것 없소. 횡수란 건 하늘에서 별안간 벼락처럼 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가며 마주치는 크고 작은 탈을 이르는 법이지요. 일 년 열두 달, 제철마다 드는 액을 제때 다스려 주면 험한 횡수도 순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법이오.”
그 말에 분이는 바짝 죄어들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일러주시면 제가 무엇이든 정성껏 챙기겠습니다.”

달마다 찾아오는 액을 막는 지혜
만신은 무릎을 짚으며 분이의 눈을 똑바로 보았습니다. 한 번의 굿이나 요란한 의식으로 일 년 치의 모든 근심을 단번에 쓸어버릴 수는 없는 법이라는 이야기였지요.
“잘 들으시오. 정월달 드는 홍수는 오늘 같은 설날에 어른들께 정성껏 드리는 세배로 막아내는 것이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첫 인사를 바르게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막이지요.”
“아, 세배로 홍수를 막는군요.”
분이가 고개를 끄덕하자 만신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렇지요. 이어지는 2월 홍수는 찬 음식을 먹으며 몸가짐을 다잡는 한식날 막고, 꽃 피는 3월 홍수는 삼짇날 막아내며, 4월 홍수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 공덕을 쌓아 막는 법이오. 5월 홍수는 창포물에 머리 감는 단오날 막고, 6월 홍수는 맑은 물에 몸을 씻는 유두날 막아야 하지요.”
분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달마다 지켜야 할 날들을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겼습니다. 그저 만신이 대신 물리쳐 주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사시사철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스스로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7월 홍수는 견우직녀 만나는 칠석날 막고, 8월 홍수는 온 곡식 풍성한 한가위로 막으며, 9월 홍수는 구일날 막아내는 것이오.”
만신의 낭랑한 소리는 마치 달마다 피어나는 계절의 노래처럼 방 안을 메웠답니다.

무시루떡과 옹시미 팥죽의 약속
어느덧 이야기는 한 해가 저물어가는 늦가을과 겨울의 문턱으로 다다랐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10월 상달 홍수는 무엇으로 막는지 아시오?”
만신의 물음에 분이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상달에는 햇곡식이 나니, 떡을 해 올리는 것입니까?”
“용하구려. 10월 상달 홍수는 달디단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무시루떡을 쪄서 막는 법이오. 그리고 밤이 가장 긴 동짓달 홍수는 새알심 옹시미를 빚어 넣은 붉은 팥죽으로 막아야 하지요. 마지막 섣달 홍수는 스무닷새 날 태종차기로 말끔히 막아내는 것이오.”
분이는 10월의 갓 쪄낸 무시루떡과 동짓달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옹시미 팥죽을 떠올렸습니다. 액을 막는다는 것은 멀리 있는 신비한 비방이 아니라, 제철에 나는 것을 거두어 이웃과 나누고 가족을 먹이는 소박한 손길 그 자체였던 셈이지요.
“만신 어르신, 제가 잊지 않고 상달에는 무시루떡을 도톰하게 찌고, 동짓달에는 옹시미 동글려 팥죽을 쑤어 식구들과 고루 나누겠습니다. 그리하면 올 한 해도 큰 탈 없이 넘어가겠지요?”
“암요. 그렇게 달마다 정성을 잊지 않는 집에 어찌 횡수가 머물겠습니까.”
만신은 흐뭇한 얼굴로 분이의 손을 쥐어주었답니다.

가벼워진 발걸음과 따뜻한 떡국
의례를 마친 분이는 신당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습니다. 품에 무겁게 안고 왔던 초와 쌀보따리는 비워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든든하고 훈훈한 기운이 가득 차올랐지요.
사립문을 나서자 정월 아침의 차가운 공기는 여전했지만, 조금 전처럼 매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길가에는 설빔을 곱게 차려입은 동네 아이들이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올리느라 웃음소리가 자자했답니다.
‘그래, 당장 오늘 정월 홍수는 어른들께 올리는 세배로 막고, 돌아오는 달마다 정성을 다하면 되는 일이지.’
집으로 돌아온 분이를 남편과 아이들이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어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떡국이 식을까 봐 기다렸어요.”
“오냐, 우리 식구들 일 년 열두 달 무탈하라고 좋은 말씀 듣고 왔다. 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 올리고 다 함께 떡국 한 그릇씩 비우자꾸나.”
김이 오르는 떡국 그릇을 나누며 분이는 식구들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뜻밖의 액을 미리 막아내려던 정월 초하루의 작은 발걸음은, 그렇게 가족을 살피는 따스한 다짐이 되어 새해의 첫날을 환하게 밝혀주었답니다.
홍수맥이의 정의와 의례 기간
홍수맥이(횡수막이)는 일상적 삶 속에서 닥쳐올 뜻밖의 횡수나 액을 미리 막아내기 위해 행하는 무속의례입니다. 이 의례를 행하는 시기는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대략 보름 동안입니다.
만신집 방문과 의례 절차
사람들은 홍수맥이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목욕재계하고 초, 향, 쌀, 막걸리와 소액의 금전을 들고 만신집으로 찾아갑니다. 무당은 일 년 동안 닥쳐올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대한 공수를 내리고, 가족 성원들의 생년월일과 성명을 청하면서 나쁜 액운을 막아내기를 기원합니다. 이 의례를 큰굿으로 치를 때는 홍수맥이굿이라고 하며, 굿 뒷부분에서 행해지는 창부거리를 통해 일 년 열두 달에 들어오는 나쁜 액을 막아냅니다.
일 년 열두 달 홍수 방어 방식
홍수맥이에서는 달마다 드는 액운을 특정한 명절이나 절식으로 나누어 막는 방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 정월달: 설날 세배로 막음
- 2월: 한식날 막음
- 3월: 삼짇날 막음
- 4월: 초파일에 막음
- 5월: 단오날 막음
- 6월: 유두날 막음
- 7월: 칠석날 막음
- 8월: 한가위로 막음
- 9월: 구일날 막음
- 10월 상달: 무시루떡으로 막음
- 동짓달: 옹시미 팥죽으로 막음
- 섣달: 스무닷새 태종차기로 막음
홍수맥이는 전통 사회에서 일상적인 액운을 다스리던 무속의례로 행해졌으며, 오늘날에도 민속 신앙 및 전통 문화의 한 영역으로 그 맥락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도입부와 전개 과정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세세한 대화, 이른 아침의 외출 풍경, 심리 묘사 등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창작된 허구(Fiction)입니다. 다만 홍수맥이가 횡수와 액을 막기 위한 무속의례라는 점,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행해진다는 사실, 초·향·쌀·막걸리·금전을 지참해 만신집을 찾는 과정, 그리고 정월 세배부터 섣달 태종차기에 이르기까지 열두 달의 홍수 방어 방식과 무시루떡·옹시미 팥죽 등의 음식 쓰임은 문헌에 기록된 엄격한 민속적 사실(Fact)에 근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