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뒤에 숨은 웃음, 샌님 어디 가셨소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마을 마당, 거들먹거리며 나타나야 할 양반 어르신이 보이지 않자 춘삼이와 돌소이가 당황합니다. 전통 가면극 속 양반 마당의 풍자와 해학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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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님은 오지 않고 장단만 높아가네

옛사람들은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고 큰 잔치를 벌일 때면 마당 한가운데 모여 탈을 쓰고 놀았습니다. 해서 탈춤이든, 경기도의 산대놀이든, 경상도 바닷가의 야류와 오광대든 마당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들이 있었지요. 바로 턱을 치켜들고 거들먹거리지만 실속은 하나도 없는 양반들이었답니다.

그런데 오늘 잔치가 열릴 마을 마당에는 조금 색다른 걱정이 생겼습니다. 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꽹과리가 쨍쨍 울려 퍼지는데, 정작 샌님 역할을 맡은 김 참봉 어르신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거든요.

말뚝이 탈을 손에 쥔 춘삼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마당 구석을 서성였습니다.

“돌쇠야, 김 참봉 어르신 댁에 기별은 단단히 넣어둔 게 맞느냐? 관객들이 벌써 멍석을 둘러싸고 앉았는데 마당을 시작조차 못 하겠구나.”

돌쇠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며 고개를 내저었지요.

“진작에 다녀왔지요. 집안에 무슨 급한 송사라도 들었는지 의관을 챙기다 말고 허둥지둥 서책을 찾고 계시더란 말입니다. 곧 오신다더니 해가 벌써 중천을 훌쩍 넘어가네요.”

바깥에서 왁자지껄한 구경꾼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들어오자 춘삼이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습니다.

마을 마당에서 붉은색 말뚝이 탈을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춘삼과 이마의 땀을 닦는 돌소이

어디 그 양반들 근본이나 풀어볼까

“어르신만 마냥 기다리다간 구경꾼들 다 흩어지겠다. 멍석 깔아놓고 굿거리장단만 칠 수는 없는 법이지.”

춘삼이가 붉은빛이 도는 험상궂은 말뚝이 탈을 얼굴에 쓱 갖다 대더니 털썩 마당 한가운데 주저앉았습니다. 돌쇠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지요.

“샌님도 안 계신데 혼자 마당에 먼저 나서려고?”

“아니, 우리끼리 재담 연습이나 먼저 실컷 해두자꾸나. 통영 오광대 놀이패 형님들이 하던 소리 기억나지? 뼈대 높은 양반이라 거들먹거리는 자들의 밑천을 탈 뒤에서 낱낱이 까발리던 그 소리 말이다.”

춘삼이가 능청스럽게 목을 가다듬더니 말채찍을 바닥에 탁 쳤습니다.

“양반 나오신다! 양반이라고 하니 삼정승 육판서 지낸 지체 높은 양반인 줄 아느냐? 개살구 껍질 같은 원양반 선대는 기생이 여덟이요, 뒤따라오는 차양반은 근본 없는 종의 자식 서출이라더라!”

돌쇠는 저도 마냥 흥이 나서 키득거리며 징채로 장단을 쿵짝 맞췄습니다. 곁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풍물패 사람들도 춘삼이의 입담에 귀를 쫑긋 세웠지요.

“홍백양반은 어떠하고? 붉은 뺨에 흰 뺨 붙었으니 아비가 둘이라 홍가 백가 두 아비요, 새까만 먹탈양반은 제 어미가 부정을 타서 숯덩이가 되었다지!”

“어허, 손님양반과 비뚜르미양반도 빼놓으면 서운하지!”

돌쇠가 너스레를 떨며 맞받아치자 춘삼이가 한술 더 떴습니다.

“손님양반은 천연두 역신이 마마 자국을 깊숙이 새겨놓았고, 비뚜르미양반은 온몸이 비비 꼬여 똑바로 서지도 못한다지 않더냐! 제 근본 하나 떳떳지 못한 것들이 갓 쓰고 도포 입었다고 백성을 쥐어짜려 드니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이냐!”

거침없이 쏟아지는 재담에 마당 뒤편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이 배를 잡고 껄껄 웃기 시작했습니다.

붉은색 말뚝이 탈을 쓰고 바닥에 말채찍을 치며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춘삼과 꽹과리를 치는 돌소이

호통치며 나타난 허둥지둥 샌님

“조리중양반은 또 보살인 어미가 서방질을 해서 낳았다니, 이런 천하의 잡것들이 어디 또 있단 말이냐!”

춘삼이가 말채찍을 힘차게 휘두르며 마지막 대목을 외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게, 게 섰거라! 이놈 말뚝아, 네 놈이 감히 뉘 앞에서 그따위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느냐!”

흙먼지를 툭툭 풀풀 날리며 마당 어귀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들었습니다. 갓은 한쪽으로 비뚤어져 귀에 얹혀 있고, 도포 자락은 흙탕물에 젖은 채 숨을 턱까지 몰아쉬는 김 참봉 어르신이었지요.

어르신은 권위를 세우려 헛기침을 크게 내뱉었습니다.

“에헴! 크흠! 체통 없이… 감히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흠흠, 족보를 능멸하다니 용서치 않겠다!”

하지만 숨이 가빠 말끝마다 쉰소리가 새어 나왔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버선 한 짝은 벗겨져 짚신 밖으로 발가락이 삐죽 나와 있었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 꼴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웅성거렸습니다.

“저것 보게, 방금 춘삼이가 말한 비뚜르미양반이 살아서 걸어온 줄 알았네 그려!”

“아이고, 양반 체면 차리려다 다리가 다 풀리셨구먼!”

체통을 차리려 눈을 부릅뜰수록 어르신의 모습은 산대놀이 마당의 무기력하고 무능한 샌님 그 자체였습니다. 마당 안팎에서 참지 못한 웃음보가 와르르 터져 나왔지요.

갓이 비뚤어지고 도포 자락이 흙탕물에 젖은 채 숨을 몰아쉬며 마당에 뛰어 들어오는 김 참봉 어르신

탈을 쓰면 모두가 하나 되는 판

김 참봉 어르신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져 삿대질을 하려다 멈칫했습니다. 서슬 퍼런 꾸짖음 대신 쏟아지는 사람들의 맑은 웃음소리에 어쩔 줄 몰라 비뚤어진 갓을 고쳐 쓰려고만 했지요.

그때 돌쇠가 얼른 다가가 허리를 굽히며 손에 쥐고 있던 하얀 샌님 탈을 공손히 받쳐 들었습니다.

“어르신,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마침 마당에 양반의 체통을 제대로 보여주실 큰 어른이 안 계셔 저희끼리 헛소리를 늘어놓던 참이었습니다. 어서 이 탈을 쓰시고 저 방자한 말뚝이 놈의 버릇을 따끔하게 고쳐주시지요!”

화를 버럭 내는 대신 능청스레 판을 깔아주는 돌쇠의 눈짓에, 춘삼이도 채찍을 거두고 마주 절을 꾸벅 올렸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샌님! 이 말뚝이가 눈이 어두워 진짜 큰 양반을 몰라봤으니 어서 호통을 다시 쳐보십시오!”

김 참봉은 멍하니 둘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헛헛한 웃음을 픽 터뜨렸습니다.

“허허, 요 고약한 놈들 같으니. 날 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어르신은 흙 묻은 소매를 툭툭 털더니 주저 없이 하얀 샌님 탈을 얼굴에 푹 눌러썼습니다. 탈구멍 너머로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지요.

“쉬이—! 말뚝아, 양반을 불렀으면 네 놈이 먼저 엎드려 절을 해야지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김 참봉이 탈을 쓴 채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우스꽝스럽게 어깨춤을 추기 시작하자, 징과 장구가 와당탕 울리며 화답했습니다.

하인의 신랄한 조롱과 양반의 뻔뻔한 허세가 장단 속에서 한데 엉켜 돌아갔습니다. 억눌렸던 응어리를 시원한 웃음으로 털어버리며, 탈춤 마당은 그렇게 너나들이 모두가 어깨를 겯는 신명 나는 해원의 잔치로 물들어 갔답니다.

마을 마당에서 돌소이가 공손히 인사하며 하얀색 샌님 탈을 김 참봉에게 건네는 모습
하얀색 샌님 탈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기쁘게 춤추는 김 참봉과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

한국의 각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전통 가면극(산대놀이, 해서 탈춤, 야류·오광대 등)의 양반 마당에는 공통적으로 권위와 체통을 내세우거나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하인(말뚝이 등)에게 신랄한 조롱과 비하를 당하는 다양한 명칭과 성격의 양반 역할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지역별 탈놀이에 따라 등장하는 양반의 명칭과 세부적인 묘사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경기도 산대놀이(양주 별산대놀이, 송파 산대놀이 등)에는 샌님, 서방님, 도련님 등이 등장하며, 특히 샌님은 권위와 체통을 내세우지만 말뚝이나 쇠뚝이에게 조롱을 당하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퇴계원 산대놀이의 샌님은 매관매직으로 양반이 된 인물로 묘사됩니다.

황해도의 해서 탈춤 중 봉산 탈춤에는 생원(맏양반), 서방(둘째 양반), 도령(셋째 양반)이 등장하여 말뚝이에게 조롱을 받습니다. 강령 탈춤에는 맏양반, 진한 양반, 재물대감, 도령 등이 등장하며 맏양반이 개가죽 관을 쓰거나 재담을 펼칩니다. 은율 탈춤에는 첫째, 둘째, 셋째 양반이 등장하여 말뚝이에게 수모와 비하를 당합니다.

경상남도의 야류·오광대(수영 야류, 동래 야류, 통영 오광대, 고성 오광대, 가산 오광대 등)에서는 수양반, 원양반, 차양반, 모양반, 홍백양반, 비비양반, 종가도령 등 다채로운 양반 역할 인물이 등장하여 풍자와 해학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통영 오광대에서 말뚝이가 양반들의 근본과 족보를 폭로하는 대목이 잘 전해지는데, 원양반의 선대는 기생이 여덟이고 차양반은 종의 자식인 서출이며, 홍백양반은 홍가와 백가 두 아비를 두었고, 먹탈양반은 어미가 부정을 타서 새까맣게 되었으며, 손님양반은 천연두 역신이 흔적을 남겼고, 비뚜르미양반은 중풍기가 심하여 전신이 비틀어졌으며, 조리중양반은 보살인 어미가 서방질하여 낳았다고 신랄하게 폭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통 가면극과 양반 마당의 전승 양상 및 현대적 변화와 관련하여, 본 해설의 사실 근거에는 별도의 현대적 변천 기록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근거 없는 현대적 발전 인과나 추정적 서술은 배제합니다.

문화센터 홀에서 전통 가면극 양반 마당 캐릭터의 특유한 자세를 연습하는 전승자의 모습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묘사된 샌님(김 참봉)의 지각 소동이나 등장인물들 간의 구체적인 일상적 대화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창작된 허구적 요소입니다. 그러나 한국 각 지역의 가면극(산대놀이, 해서 탈춤, 야류·오광대 등) 양반 마당에서 양반들이 권위와 체통만 내세우며 무기력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하인(말뚝이 등)에게 조롱과 비하를 당한다는 점, 그리고 통영 오광대에서 말뚝이가 각양각색 양반들의 족보와 근본을 해학적으로 폭로하는 내용은 민속 기록에 근거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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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