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와 원천강 가는 길: 사계절이 머무는 신비로운 원천강본풀이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들판에서 태어난 아이 오늘이가 사계절이 공존하는 신의 땅 원천강을 찾아 떠난 여정과 제주 특수본풀이 '원천강본풀이'의 전승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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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옛이야기 속에 남은 신비로운 땅, 원천강

옛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한곳에 사이좋게 모여 숨 쉬는 신비로운 고장이 있다고 믿었답니다. 바로 ‘원천강’이라는 곳이지요. 제주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이 원천강에 얽힌 신기한 내력을 노래로 들려주곤 했습니다. 비록 세월이 흘러 지금은 큰 굿판에서 그 노랫소리를 직접 듣기 어려워졌지만, 옛 책 속에는 여전히 그 자취가 또렷하게 남아 있답니다.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원천강의 내력을 담은 옛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해집니다. 하나는 적막한 들판에서 태어난 슬기로운 소녀가 부모를 찾아 길을 떠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훗날 점을 치는 책으로도 이름난 『원천강』과 얽힌 이야기이지요.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울리는 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한 소녀가 제 발로 길을 나섰던 아름다운 여정이랍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함께 어우러진 신비로운 원천강의 풍경을 담은 수채화 삽화

이름 없는 들판의 아이와 따뜻한 이름 ‘오늘이’

풀벌레 소리만 쓸쓸하게 맴돌던 거친 들판 한가운데, 갓난아기 하나가 홀로 누워 있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가엾은 아이를 거두어 따뜻한 미음을 떠먹이고 해진 옷가지를 덮어 주었습니다.

아이가 방긋 웃으며 옹알이를 시작할 무렵, 마을 어른 한 사람이 턱을 괴며 물었습니다.

“아가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태어난 날은 언제고?”

아이는 그저 맑은 눈망울만 깜빡일 뿐이었지요. 그러자 곁에 서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제도 내일도 모른 채 오늘 우리 품으로 찾아왔으니, 그냥 ‘오늘이’라 부르면 어떻겠소?”

“그거 참 다정하고 좋은 이름이네. 오늘아, 너는 오늘부터 우리 오늘이다.”

그렇게 따뜻한 이름을 얻은 아이는 들꽃처럼 씩씩하게 자라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이는 제 부모가 사계절이 함께 머무는 원천강에 살고 있다는 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지요. 오늘이는 조약돌처럼 단단하게 옷깃을 여미고 먼 길을 향해 첫 발걸음을 떼었답니다.

들판에 앉아 있는 아기 오늘이에게 마을 할머니가 따뜻한 미음을 먹여주는 수채화 삽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장상과 매일

원천강으로 가는 길은 아득하고 험했습니다. 한참을 걷던 오늘이의 귓가에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요. 다가가 보니 커다란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글만 읽는 도령 ‘장상’이, 다른 한쪽에는 바느질만 하는 처자 ‘매일’이 쓸쓸히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이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두 분은 어찌하여 마주 보지도 못한 채 한숨만 쉬고 계시나요?”

장상이가 책장을 넘기다 말고 울적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글만 읽고 바느질만 해야 하는 처지라오. 서로 얼굴 한번 마주하기를 간절히 바라건만, 어찌해야 이 질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소.”

매일이도 붉어진 눈시울로 덧붙였지요.

“원천강으로 가시는 길이라면, 부디 우리 두 사람이 언제쯤 함께할 수 있는지 그 까닭을 알아다 주실 수 없겠습니까?”

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이 바빴지만, 오늘이는 간절한 눈빛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염려 마세요. 제가 원천강에 닿으면 꼭 어르신들께 여쭈어 답을 가져오겠습니다.”

오늘이의 맑은 약속에 두 사람은 비로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글을 읽는 장상 도령과 바느질하는 매일 처자 앞에 선 어린 오늘이의 모습

꽃을 피우지 못하는 연꽃나무와 야광주를 품은 천하대사

발걸음을 재촉하던 오늘이는 맑은 연못가에서 또 다른 기이한 광경을 마주했습니다. 커다란 연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맨 꼭대기 윗가지에만 꽃이 딱 한 송이 피어 있고 아래쪽 가지들은 죄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있었지요.

연꽃나무가 바람결에 가지를 파르르 떨며 힘겹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착한 나그네여, 내 윗가지에는 꽃이 피는데 왜 다른 가지들에는 꽃이 만발하지 못하는지 원천강에 가거든 꼭 좀 알아봐 주오.”

오늘이는 나무의 거친 줄기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연못을 지나 큰 강가에 다다르자, 이번에는 물결 속에서 거대한 이무기인 ‘천하대사’가 불쑥 머리를 치켜들었습니다.

“어린아이야, 어디를 그리 바삐 가느냐?”

“사계절이 모여 사는 원천강으로 부모님을 찾아갑니다.”

천하대사는 번쩍이는 여의주, 곧 야광주를 여러 개 품은 채 답답하다는 듯 긴 숨을 내뿜었습니다.

“내 품에 이리도 신령한 야광주가 많은데, 천 년이 지나도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지 못하니 속이 타는구나. 그 연유를 알아다 준다면 내 너를 태워 이 깊은 물을 무사히 건네주마.”

오늘이는 이번에도 주저 없이 약속하며 천하대사의 등 뒤에 올랐습니다. 남들의 풀리지 않는 슬픔을 가슴에 하나둘 얹다 보니, 오늘이의 봇짐은 어느새 무거워졌지만 마음결만큼은 더욱 단단해졌답니다.

연못가에서 맨 꼭대기만 꽃이 핀 커다란 연꽃나무를 바라보는 오늘이의 측면 수채화 삽화

사계절이 머무는 곳에서 부모를 만나다

천하대사의 도움으로 거친 물살을 건넌 오늘이는 마침내 궁궐의 시녀궁녀들을 만나 길을 안내받았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원천강은 참으로 눈부셨지요. 동쪽에는 화사한 봄꽃이 흩날리고, 남쪽에는 짙푸른 녹음이 우거졌으며, 서쪽에는 황금빛 단풍이 들고, 북쪽에는 하얀 눈꽃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계절이 다투지 않고 어우러진 신의 뜨락이었습니다.

그 너른 뜰 한가운데서, 그리워하던 부모님이 오늘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달려왔습니다.

“아이고, 내 딸 오늘아! 이 험한 길을 어찌 찾아왔느냐!”

눈물겨운 포옹 속에서 오늘이는 부모님의 품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한참 동안 회포를 풀던 오늘이는 품속에서 길동무들의 사연을 조심스레 꺼내놓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길에서 만난 이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의 답답한 매듭을 꼭 풀어주고 싶어요.”

부모님은 딸의 기특한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해결의 비결을 일러주었습니다.

“장상이와 매일이는 서로 짝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으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연꽃나무는 꼭대기의 윗가지를 꺾어 주어야 다른 가지들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필 게다. 그리고 천하대사는 욕심껏 쥐고 있는 야광주 중 딱 하나만 남기고 남에게 나누어 주어야 비로소 하늘로 오를 수 있단다.”

매듭을 풀고 신녀가 되어 돌아오다

답을 얻은 오늘이는 원천강을 떠나 다시 인간 세상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부모를 만나 제 뿌리를 찾았으니 이제 길동무들과의 약속을 지킬 차례였지요.

강가로 돌아온 오늘이는 천하대사에게 다가가 차분히 일렀습니다.

“대사님, 욕심을 내려놓고 야광주를 하나만 남긴 채 나머지를 제게 나누어 주셔요. 그래야 하늘 문이 열립니다.”

천하대사가 미련 없이 여분의 야광주를 오늘이의 손에 건네자, 눈부신 번개와 함께 거대한 몸이 찬란한 용으로 변하여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야광주를 얻은 오늘이는 곧장 연꽃나무에게 달려가 꼭대기의 윗가지를 꺾어 주었지요. 그러자 말라붙었던 가지마다 탐스러운 연꽃이 일제히 피어나며 그윽한 향기를 뿜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이는 장상과 매일을 찾아가 두 사람의 손을 마주 잡게 해 주었습니다.

“두 분이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랍니다.”

두 사람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오늘이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연꽃과 야광주를 품에 안은 오늘이는 남을 도운 공덕을 인정받아 옥황상제의 신녀가 되었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사계절의 질서를 다스리며 원천강을 등사하게 되었습니다. 제 슬픔을 넘어 남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었던 아이의 발자국은 그렇게 눈부신 전설로 남았답니다.

빛나는 야광주를 품에 안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과 그 곁에 선 오늘이의 모습

제주도의 서사무가와 ‘원천강본풀이’의 의미

‘원천강본풀이’는 제주도 지역에서 조사되었던 서사무가로, 오늘날에는 연행 맥락을 잃고 실제 굿판에서 전승되지 않는 이른바 ‘특수본풀이’에 해당합니다. 학계에 보고된 현전하는 각편은 아카마쓰 지조와 아키바 다카시가 조사한 ‘박봉춘본’과 진성기가 채록한 ‘조술생본’ 두 편뿐으로, 전파된 경로에 따라 서로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원천강’이라는 명칭은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로 사용됩니다. 사계절이 모두 공존하는 신의 공간을 뜻하기도 하고, 점복에서 다루는 명리학 저서인 『원천강』(원서명 『원천강오성삼명지남袁天綱五星三命指南』)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한 당대 실존 인물의 이름에서 유래한 사람 이름이나, 직업으로서의 ‘점쟁이’ 및 ‘무당’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두 가지 각편의 전승 내용

‘박봉춘본’은 적막한 들에서 출신과 이름을 모른 채 태어난 소녀가 사람들이 지어 준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부모가 있는 원천강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이는 길에서 장상, 매일, 연꽃나무, 천하대사, 시녀궁녀를 만나 문제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길을 안내받고, 사계절이 공존하는 원천강에 이르러 부모와 상봉한 뒤 문제 해결법을 얻어 옥황상제의 신녀가 되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원천강을 등사합니다.

반면 ‘조술생본’은 원천강의 남편이 왕이 되려다 사령에게 쫓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숨은 뒤 오해로 인해 남편이 잡혀가게 만들고, 남편은 부인에게 『원천강』(명리학 책)이나 보고 살라 이르며 떠납니다. 이로 인해 부인은 점쟁이이자 무당인 ‘원천강’이 되었다는 내력을 전합니다.

오늘날의 문화 콘텐츠 활용

‘원천강본풀이’는 현지 전승 맥락이 끊어져 실제 굿판에서는 불리지 않으나, 오늘날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성강 감독의 애니메이션 〈오늘이(2003)〉 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설화의 매력이 대중에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오늘이' 캐릭터 홍보 아트웍이 대형 스크린에 전시된 현대적인 디지털 미디어 전시장

기록된 전설과 역사적 사실의 구분

‘원천강본풀이’의 ‘박봉춘본’과 ‘조술생본’에 등장하는 서사는 문헌에 기록된 전설 및 서사무가일 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등 창작물에서 확장된 생태적 운명관이나 인물의 세부 행동 변화 등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각색에 해당하므로, 이를 실제 전통 의례의 효능이나 역사적 사실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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