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마루의 청우와 사흘의 기다림: 태백제의 역사와 전통

1982년부터 이어져 온 강원도 태백제와 신라 시대부터 전해지는 태백산 천제, 그리고 산정 신사 앞에 소를 두고 돌아선 '퇴우' 금기 풍속의 이야기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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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태백산 길을 오르는 푸른 소와 사람들

시월의 찬 바람이 태백산 골짜기를 굽이쳐 흐르던 날이었습니다. 신라 때부터 나라의 큰 제를 올리고 봄가을로 주민들이 모여 정성을 바쳐 온 이 거룩한 산에, 가을맞이 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지요. 행렬 맨 앞에는 윤기 흐르는 털을 지닌 건장한 소 한 마리가 뚜벅뚜벅 바윗길을 밟고 있었습니다. 바로 옛 기록에 전하는 청우였습니다.

마을 청년 산돌이는 소삐를 팽팽하게 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소가 가파른 고갯길에서 발을 헛디딜세라 땀을 훔치며 보조를 맞추었지요.

“어르신, 신사까지 가려면 아직 고개를 둘은 더 넘어야 하지요?”

뒤따라오던 김 참봉이 짚신 소리를내며 껄껄 웃었습니다.

“녀석, 소 숨소리보다 네 숨소리가 더 크구나. 저 녀석은 하늘에 바칠 귀한 소라 걸음걸이도 이리 의젓하지 않느냐. 서두르지 말고 찬찬히 가자꾸나.”

산돌이는 그 말에 단단한 소의 등을 툭 치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파사왕 시절부터 나라의 제물로 올렸다던 옛이야기 속 청우처럼, 소는 신령스러운 산길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직하게 발걸음을 옮겼답니다.

태백산 바윗길을 오르는 산돌이와 김창봉 노인, 그리고 소의 모습

신사 앞의 고삐와 '퇴우'의 금기

마침내 산정상 신당 앞에 다다랐습니다. 차가운 산바람이 거친 돌단을 스치며 휭휭 소리를 냈지요. 돌단을 정돈하고 조용히 예를 올린 뒤, 김 참봉이 산돌이를 불러 세웠습니다.

“산돌아, 이제 『허백당집』에 적힌 오랜 풍습대로 퇴우를 해야 한다. 소를 신사 앞 기둥에 단단히 매어 두고, 우리는 곧장 내려가야 해.”

산돌이는 둥그런 눈을 깜빡이며 물었습니다.

“예? 소를 여기에 혼자 두고 간단 말입니까?”

“그렇단다. 소를 매어 둔 뒤에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돼. 그 길로 마을로 내려가 사흘 동안 근신하며 기다렸다가,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올라와 소를 몰고 내려오는 것이 오래된 법도란다.”

산돌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삐를 신사 앞 나무 기둥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소가 큰 눈망울을 끔벅이며 산돌이를 빤히 바라보았지요. 김 참봉은 산돌이의 등을 툭 치며 먼저 돌아섰습니다.

“자,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라.”

산돌이가 제단 앞 기둥에 소를 묶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돌아보는 모습

몰려드는 산안개와 무거운 발걸음

그런데 말이지요, 하산길에 접어든지 얼마 되지 않아 느닷없이 산 밑바닥에서 허연 안개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짙은 안개는 순식간에 앞서가던 사람들의 등마저 지워 버릴 듯 능선을 뒤덮었지요. 싸늘한 안갯김이 옷깃을 적시자 산돌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이 높은 산꼭대기에 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어쩌지? 날이 이렇게 궂은데 사흘이나 소를 홀로 둔다니…….’

뒤통수가 따가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 산마루를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 때문에 발끝만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했지요.

“어르신, 안개가 너무 짙습니다. 소가 놀라 고삐를 풀고 날뛰면 어쩝니까? 제가 잠시만 올라가 묶음만 다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산돌이가 발걸음을 멈추자, 김 참봉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다, 산돌아.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건 정성이 아니라 의심이 되는 게야. 걸음을 재촉해라.”

산돌이는 입술을 꾹 깨물며 무거운 다리를 끌고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답니다.

산안개가 낀 하산길에서 김창봉 노인이 산돌이를 만류하는 모습

사흘의 기다림이 품은 뜻

마당으로 돌아왔지만 산돌이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이튿날에도 산마루 쪽만 바라보며 서성이자, 마당에서 제기를 닦던 김 참봉이 산돌이를 불렀습니다.

“산돌아, 그렇게 마당귀만 파헤치고 있을 텐가? 여기 와서 이 놋그릇이나 함께 닦거라.”

산돌이가 다가와 속상하다는 듯 여쭈었습니다.

“어르신, 홀로 남겨진 소가 애처로워 손에 일이 잡히지 않습니다. 어째서 사흘이나 소를 방치해야 하는 건가요?”

김 참봉이 그릇을 짚풀로 문지르며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방치가 아니란다. 산정에 소를 두고 오는 것은 내 조급한 마음과 욕심을 산 아래로 물리는 일이지. 그 사흘 동안 우리는 소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온 마을 사람들과 밥을 나누고, 제물을 살피며, 한마음으로 정성을 모으는 게야. 내 손으로 당장 결말을 보겠다는 조바심을 내려놓는 시간이지.”

그 말을 들은 산돌이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마을 아낙들은 정갈하게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고, 청년들은 천제단으로 올릴 제기를 손질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흩어졌던 마을 사람들의 손길이 제사를 위해 하나로 모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소를 위해서라도 남은 시간 동안 마을의 일손을 부지런히 돕겠습니다.”

산돌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고 제물을 나르며 정성을 다해 사흘을 채워 나갔답니다.

마을 마당에서 햇살 아래 제기구와 음식을 준비하는 산돌이와 주민들

맑게 갠 산마루와 천제단의 온기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언제 안개가 끼었냐는 듯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게 열렸습니다. 산돌이는 김 참봉과 제관들을 앞장서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태백산을 올랐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된 태백산 천제단 주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신사 앞 소나무 아래를 바라보던 산돌이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청우가 바위에 엉덩이를 기대고 엎드려 여유롭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녀석은 다가오는 산돌이를 보더니 반갑다는 듯 푸르르 콧김을 뿜었습니다.

“무사했구나! 정말 잘 기다려 주었어.”

산돌이가 소의 목덜미를 얼싸안자 김 참봉이 흐뭇하게 웃었습니다.

“보아라. 사흘 동안 마을이 정성을 모으니 산도 화답한 게지.”

정갈하게 준비해 온 제물을 단 위에 올리고, 온 마을 사람들이 둘러서서 하늘에 정성껏 제를 올렸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견뎌낸 사흘의 기다림 끝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노고를 다독이며 깊은 화합의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그 옛날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온 하늘을 향한 정성이, 오늘날 온 시민이 화합하는 태백제의 따뜻한 온기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순간이었답니다.

태백산 정상에서 건강하게 되새김질하는 소와 기뻐하는 산돌이와 주민들

태백산 천제와 제의의 역사적 유래

태백산에서의 제천 의례는 삼국시대부터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는 오랜 전통입니다. 『삼국사기』 일성이사금조에 따르면 일성이사금 5년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친히 태백산에서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 파사왕 때 태백산 정상에 단을 쌓고 청우(靑牛)를 제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이후 국가의 중사로서 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전합니다.

이후 산 정상에 천왕당(태백산사)을 건립하여 경상도와 강원도 인근 주민들이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며, 구한말 민족의 수난기에는 제의의 대상이 단군으로 변경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매년 개천절에 봉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태백산에서 행해지는 주요 제의로는 태백산 천제, 단군제, 산신제, 산업전사위령제 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헌에 전하는 ‘퇴우’ 금기 풍속

성현의 『허백당집』에는 태백산 제의와 관련된 독특한 풍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정에 신당을 지어 제사를 지낸 후에, 신사 앞에 소를 매어두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하산하였다가 3일 만에 다시 올라와 소를 몰고 내려오는 ‘퇴우(退牛)’라는 금기 풍속이 존재했습니다.

태백제의 개최와 민간 주도적 운영

강원도 태백시에서 해마다 10월에 열리는 태백제는 지역의 대표적인 종합축제입니다. 1981년 태백시 승격 이후 산발적으로 열리던 문화예술 행사를 하나로 통합하여 1982년에 제1회 태백제가 개최되었습니다.

태백제는 태백제전위원회가 주최하고, 태백문화원, 예총태백지부, 민예총태백지부가 주관하여 민간 주도형 형태로 운영됩니다. 천제가 거행되는 태백산 천제단은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시민 화합과 민속문화의 계승

오늘날 태백제는 시민의 단결과 화합을 꾀하고 전래의 민속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향토 축제이자 시민축제로 자리 잡아가며 매년 10월에 개최되고 있습니다.

10월 태백시에서 열린 태백제 현수막과 모인 시민들의 모습

본문에 등장하는 청년 ‘산돌’과 그가 겪는 갈등, 하산길의 날씨 변화 및 등장인물 간의 대화는 성현의 『허백당집』에 기록된 ‘퇴우’ 풍속과 신라 시대 청우 제물 기록을 바탕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창작된 허구적 서사입니다.

반면, 신라 시대 태백산 천제 기록(『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조선시대 『허백당집』의 ‘퇴우’ 풍속 기록, 태백산 천제단(중요민속자료 제228호), 그리고 1982년 제1회 개최 이래 민간 주도형으로 이어져 온 태백제의 역사와 성격은 엄연한 역사적·문화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관련 장소

태백산 천제단

중요민속자료 제2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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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