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칼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연못 위로 쩍 갈라진 얼음 금. 물속에 숨은 용이 밭을 갈고 지나간 흔적이라 믿었던 우리 고유의 농사점 '용경'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코테일 이야기책 듣기
천천히, 이야기의 호흡을 따라 들어보세요.
얼어붙은 공검지로 향하는 발걸음
손끝이 아릴 만큼 매서운 한파가 옷깃을 파고들던 날이었지요. 상주 공검지 둘레는 하얀 서리와 바스락거리는 마른 갈대로 둘러싸여 고요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열두 살 돌쇠는 털모자를 푹 눌러쓴 채, 눈을 찡그리며 앞서 걷는 할아버지의 두툼한 도포 자락을 종종걸음으로 쫓았답니다.
“할아버지, 이 추위에 얼어붙은 연못에는 대체 왜 가자고 하신 거예요? 바람이 불 때마다 볼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돌쇠가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을 호호 불며 투덜거리자,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빙그레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글쎄다, 옛 어른들이 이르기를 이 못에 얼음이 꽁꽁 얼면 용이 나와 밭을 갈고 간다 하였거든. 그 얼음이 어느 방향으로 갈라졌는지를 보아야 올 한 해 농사가 어찌 될지 알 수 있단다. 그걸 ‘용경’이라 부르지.”
“용이 얼음 위에서 밭을 간다고요? 이 넓고 차가운 얼음판을요?”
돌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얗게 얼어붙은 수면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쩍 소리만 울리는 단단한 얼음판
연못 가장자리에 이르자 시퍼런 빛이 감도는 두꺼운 얼음판이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돌쇠는 조심스럽게 발을 딛고 서서 얼음 바닥을 샅샅이 훑어보았지요. 며칠째 이어진 매서운 추위 탓에 얼음은 빈틈 하나 없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무리 둘러보아도 용이 지나간 자리는 안 보여요. 그냥 밋밋하고 투명한 얼음판뿐인데요?”
돌쇠가 답답하다는 듯 얼음 위를 콩콩 구르자, 물속 깊은 곳에서 ‘쩌엉-’ 하고 묵직한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깜짝 놀란 돌쇠는 벼락이라도 친 것처럼 할아버지의 소매를 홱 낚아챘지요.
“허허, 녀석도 참. 얼음이 숨을 쉬느라 내는 소리란다. 조급해할 것 없다. 용의 밭갈이는 사람이 재촉한다고 쉬이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아니거든.”
할아버지는 나뭇가지 지팡이로 얼음 표면을 툭툭 치며 수면 한가운데를 가만히 응시했습니다.

한가운데를 가른 시원한 물길 자국
산 너머로 붉은 노을이 뉘엿뉘엿 내려앉을 무렵이었습니다. 칼바람에 볼이 빨갛게 물든 돌쇠는 포기하지 않고 저수지 안쪽으로 조금 더 걸음을 옮겼습니다. 바로 그때였답니다. 발아래에서 가느다랗게 시작된 하얀 줄기가 못 한가운데를 향해 시원스레 뻗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여기 좀 와서 보세요! 얼음이 길게 터졌어요!”
돌쇠의 외침에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얼음판 한가운데를 쟁기질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길고 깊게 갈라진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지요.
“참으로 기특한 일이지요. 공검지 복판을 이처럼 시원스레 가르고 지나갔으니 말이다. 옛말에 저수지 한가운데가 갈라지면 그해 들판에 물이 넉넉하고 벼가 아주 굵게 여문다고 하였지.”
“그럼 올해 우리 마을 농사는 대단한 풍년이 드는 건가요?”
돌쇠의 반짝이는 눈빛에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말로 용이 물속에서 솟구쳐 얼음을 갈아놓은 듯한 신기한 모양새에 돌쇠는 넋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외양간 황소를 향해 바빠진 발걸음
돌쇠는 얼음 틈새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조금 더 구경하고 싶어 입술을 씰룩거렸습니다. 하지만 먼 산자락 너머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며 어스름이 짙어지기 시작했지요.
“돌쇠야,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정월에는 우리 집 황소 녀석에게도 따뜻한 밤참을 쑤어 먹여야 하지 않겠느냐.”
할아버지의 말에 돌쇠는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한 해 동안 고되게 농사일을 도울 소에게 밤참으로 뜨끈한 소죽을 챙겨 먹이는 것이 집안의 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참, 누렁이가 외양간에서 배를 곯고 기다리겠네요! 얼른 가요, 할아버지.”
돌쇠는 신기한 얼음 구경에 아쉬움을 삼키며, 할아버지의 손을 이끌고 집을 향해 가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따뜻한 웃음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돌쇠는 짚과 겨를 솥에 듬뿍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습니다.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가마솥 뚜껑 틈으로 구수한 소죽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지요. 잘 익은 소죽을 바가지로 퍼 담아 외양간으로 달려가자, 누렁이가 반갑다는 듯 커다란 눈망울을 끔벅이며 낮은 소리로 ‘음메’ 하고 울었습니다.
“자, 낮에 본 공검지 용만큼이나 힘을 내라고 아주 푹 쑤어 왔다.”
할아버지가 구유에 김이 펄펄 나는 소죽을 부어주자, 누렁이는 후후 입김을 불며 허겁지겁 바닥을 비워냈습니다. 그 든든한 먹성을 보며 돌쇠는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지요.
“할아버지, 우리 누렁이가 소죽을 먹는 기세를 보니 용보다 더 힘차게 논을 갈겠어요.”
“그렇고말고. 공검지 용이 갈아놓은 얼음길을 보았으니, 올해는 이 녀석과 함께 큰 풍년을 맞이하겠구나.”
겨울밤 어스름이 내린 시골 마을의 외양간 안으로, 구수한 볏짚 냄새와 함께 다정한 웃음꽃이 따뜻하게 피어올랐답니다.

용경의 정의와 의미
용경(龍耕)은 ‘용갈이’ 또는 ‘용의 밭갈이’라고도 하며, 동지 전후하여 저수지나 못에 언 얼음이 갈라진 방향과 모양을 보고 그해의 풍흉을 알아보는 농사점입니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풍농에 필수적인 물과 겨울 기후와 관련하여 수천 년 동안 경험에 의해 자생적으로 유지되어 온 민속입니다.
주요 지역별 전승과 문헌 기록
용경 풍속은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저수지와 문헌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 경북 상주 공검지: 고상안의 『태촌집』에 얼음이 얼면 용이 얼음 위에서 밭갈이를 하여 얼음이 갈라터지는 형상을 보고 이듬해의 풍흉을 점쳤다는 용경 설화가 전합니다.
- 충청도 홍주 합덕지: 매년 결빙기인 음력 정월 14일 밤 빙면이 갈리는데, 방죽 가운데가 갈리면 풍년, 주변만 갈리면 흉년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도깨비가 방죽 간다’고 하였으며, 충남 일대 가정에서는 이 날 밤 소에게 밤참으로 뜨끈한 소죽을 먹이는 풍습이 함께 전해집니다.
- 황해도 연안도호부 와룡지(남대지): 용경 현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곳으로, 『태종실록』, 『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 등에 관련 기록이 있습니다. 태종 때에는 유사에게 명하여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세조와 성종 때에는 제방 보존과 관련된 논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 문종 때의 흑룡 관련 일화도 전해집니다.
- 기타 지역: 경남 밀양 남지와 황해도 안악 석통지 등에서도 용경 현상과 관련된 기록이 확인됩니다.
한편, 조선시대 성종은 ‘용경이란 말은 괴이하고 허망하여 믿을 수가 없다’고 언급하는 등 당대에도 이러한 현상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존재했습니다.


오늘날의 전승 양상
용경은 조선시대 문헌과 민속 자료를 통해 전해지는 전통 농사점으로, 오늘날 일상생활 속에서 상시적인 풍속으로 직접 이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선조들이 겨울철 기후와 저수지의 상태를 통해 풍농을 기원하고 자연의 섭리를 읽고자 했던 농경 문화의 역사적 자취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이야기와 역사·민속 사실의 경계
앞서 구성된 이야기 속 상주 공검지 인근 마을의 ‘돌쇠’와 ‘할아버지’라는 구체적 인물, 얼음판 위에서 나눈 대화, 외양간의 황소에게 소죽을 먹이는 극적이고 세부적인 가내 생활 장면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창작된 허구적 서사입니다.
반면, 동지 전후 저수지 얼음의 갈라짐으로 풍흉을 점치던 ‘용경’의 민속적 정의, 상주 공검지·합덕지·와룡지 등 문헌에 등장하는 구체적 지역 사례, 정월 14일 밤 합덕지의 풍속과 소죽 먹이기, 그리고 『태종실록』과 『태촌집』 등에 기록된 역사적·문헌적 사실들은 모두 실제 기록과 민속 조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