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 된서리와 깨진 술잔: 마지막 국화주를 지키려는 영감과 순이의 가을 이야기

하얗게 내린 첫서리에 화들짝 놀란 영감이 마당으로 뛰쳐나가며 술잔을 떨어뜨린 날, 늦가을 24절기 상강의 풍속과 국화주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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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내려앉은 하얀 첫서리

이른 아침 문풍지가 파르르 떨리더니 방 안으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 들었습니다. 짚신을 채 꿰어 신지도 못한 채 툇마루로 뛰어나온 만복 영감은 마당을 보자마자 턱 빠진 사람처럼 입을 떡 벌렸지요.

“아이고, 저게 다 무어냐! 벌써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네 그려!”

한로가 지나고 입동을 바라보는 상강 무렵이면 찬 바람이 불어 닥친다더니, 장독대 뚜껑이며 울타리 섶마다 보얗게 소금이라도 뿌려놓은 듯 서리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밭둑의 벼 베기와 가을걷이는 진작에 끝났다지만, 영감에게는 아직 거두지 못한 가장 귀한 보물이 하나 남아 있었지요. 바로 돌담 아래 활짝 피어난 노란 국화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때 부엌 문이 스르륵 열리며 손녀 순이가 얼굴을 빼끔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 신발도 안 신고 어디를 가세요?”

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영감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국화 밭으로 버선발을 바쁘게 놀렸답니다.

마당에 내린 하얀 아침 서리를 보고 놀란 한복 차림의 할아버지

조급한 손길과 깨진 술잔

울타리 아래 가냘프게 피어난 국화는 찬 이슬과 서리를 맞아 꽃부리가 팽팽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 된서리가 한 차례 더 몰아치면 저 고운 꽃잎들이 시커멓게 얼어붙어 한 잎도 건지지 못할 게 뻔했지요.

“오늘 당장 따서 술을 담그지 않으면 다 망친다! 얼른 광에서 술독이랑 술잔 꺼내 오너라!”

“할아버지, 아직 꽃잎에 서리가 앉아 단단해요. 볕이 조금 들고 나서 따도 늦지 않아요.”

순이가 달래듯 할아버지의 소매를 붙잡았지만, 성미 급한 영감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영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꽃가지를 급하게 꺾어 채반에 마구 쑤셔 넣었지요. 그러고는 찬바람 부는 마당 한구석에서 애지중지하던 옛 옥빛 술잔을 씻겠다고 우물가로 서둘러 걸어갔답니다. 그런데 발을 헛디디며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만 잔을 댓돌에 딱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쨍그랑! 맑고도 아픈 소리와 함께 술잔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마당 돌계단 근처에서 옥색 술잔을 떨어뜨려 깨뜨린 할아버지

서풍을 향해 잔을 씻는 뜻

“아이고, 내 잔! 가을마다 이 잔에 술을 받아 마셔야 한 해가 제대로 가는 법인데…….”

만복 영감은 주저앉아 깨진 잔 조각을 손으로 쓸어 모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차가운 서풍이 마당을 휭하니 훑고 지나가자 영감의 파리해진 얼굴이 한층 더 쓸쓸해 보였지요. 옛 선비 권문해의 시에도 ‘노포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다’ 하더니, 딱 영감의 처지가 그 짝이었습니다. 잎에 병들어 시드는 시냇가 버들가지처럼, 영감의 어깨도 사정없이 축 늘어졌지요.

그때 순이가 조용히 다가와 영감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습니다.

“할아버지, 잔은 깨졌어도 꽃은 아직 울타리 아래 성하게 피어 있어요. 쪼개진 잔이야 질그릇 사발로 바꾸면 그만이지만, 꽃잎은 지금 안 거두면 정말로 다 얼어버리잖아요. 어서 저랑 꽃부터 모아요.”

순이의 야무진 눈망울을 들여다보던 영감은 멋쩍은 듯 콧등을 찡그리며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깨진 잔 조각을 내려놓고 무릎을 털며 일어섰습니다.

울타리 옆에서 분홍색 한복을 입은 손녀 순이가 할아버지의 거친 손을 감싸 쥐는 모습

찬 서리 맞으며 빚은 국화주

어느덧 하늘이 어둑해지고 산봉우리는 파리하게 야위어 갔으며, 구름 끝에는 놀란 기러기 떼가 길게 줄을 지어 날아갔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팔방에 된서리가 소리 없이 내려앉아 천지가 숨을 죽인 듯 숙연해졌지요.

만복 영감과 순이는 호롱불을 켜놓고 툇마루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차가운 서풍이 문틈으로 매섭게 파고들었지만, 두 사람의 손길은 쉴 틈 없이 움직였지요. 순이가 맑은 샘물에 티끌을 골라내며 정갈하게 꽃잎을 씻어 건지면, 영감은 큼직한 질그릇 항아리에 밥과 누룩을 버무리며 조심스럽게 꽃잎을 섞어 넣었습니다.

“할아버지, 꼭 귀한 술잔이 아니어도 이 투박한 독 안에서 국화 향이 아주 진하게 피어나요.”

순이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영감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허허, 그러게 말이다. 내가 괜한 욕심에 잔 타령만 늘어놓았구나. 네 손길이 닿으니 올해 술맛이 더 달겠어.”

밤새도록 두 사람이 함께 숨을 모아 빚은 술독 속에서 은은한 국화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져 나갔답니다.

밤에 기름등불 아래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항아리에 국화잎을 넣는 모습

맑은 하늘 아래 가을 나들이

참 기특한 일이었지요. 이튿날 아침이 되자 간밤의 된서리가 온 세상을 깨끗이 씻어낸 듯 가을 하늘이 거울처럼 맑고 투명하게 트였습니다. 숲의 단풍은 붉고 노랗게 물들어 절정을 이루고 있었지요.

만복 영감은 잘 익은 국화주를 질그릇 주전자에 넉넉히 담아 어깨에 메고, 순이의 손을 잡은 채 동네 어귀로 나섰습니다. 가을걷이를 끝낸 이웃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정겨운 얼굴로 모여들었지요.

“영감님, 아침부터 무슨 향기가 이렇게 달큼한가요?”

“서리가 내려앉기 전에 손녀 녀석과 밤새 빚은 국화주일세! 잔이 깨져 투박한 사발에 따르지만, 맛은 그 어느 때보다 깊으니 다들 한 잔씩 들고 단풍 구경이나 가세나!”

사람들은 저마다 사발을 맞부딪치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맑은 국화 향이 가을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은 울긋불긋 물든 들길을 따라 다 함께 가을 나들이 발걸음을 가볍게 옮겼답니다.

지팡이를 짚고 손녀와 함께 가을 길을 걷는 할아버지와 이웃 마을 사람들

상강의 계절적 의미와 자연 현상

상강(霜降)은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들며, 태양의 황경이 210도에 이르 때인 양력 10월 23일 무렵이자 음력 9월에 드는 24절기의 하나로 서리가 내리는 시기를 뜻합니다. 이 시기에는 밤 기온이 낮아져 서리가 내리고 첫 얼음이 얼기도 하며,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국화가 활짝 핍니다. 중국에서는 상강부터 입동 사이를 5일씩 초후, 중후, 말후의 삼후로 나누어 자연 현상을 설명하였으며, 김형수의 『농가십이월속시』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표현하였습니다.

농사력과 국가의례, 세시풍속

농사력으로 이 시기에 추수가 마무리되어 겨울맞이를 시작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상강에 국가의례인 둑제(纛祭)를 행하였습니다. 또한 중구일과 같이 국화주를 마시며 가을 나들이를 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권문해의 『초간선생문집』 상강 시에는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라며 서리가 내린 늦가을의 쓸쓸하면서도 청신한 정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상강은 24절기 중 하나로 늦가을의 깊어진 계절감을 전해주는 시기로 남아 있습니다. 단풍이 절정에 달하고 국화가 피어나는 이맘때면 자연의 변화와 함께 계절의 순환을 되새기게 됩니다.

늦가을 공원에 활짝 핀 국화와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진 풍경

본문의 만복 영감과 손녀 순이라는 인물 설정, 술잔을 깨뜨린 일화, 질그릇 주전자에 이웃들과 모여 국화주를 빚은 구체적인 상황 묘사는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작된 허구입니다. 역사적 사실인 상강의 절기적 특징, 조선시대의 둑제, 국화주와 가을 나들이 풍속, 그리고 문헌에 전하는 시의 정경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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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