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의 붉은 콩과 까투리의 눈물: 판소리 ‘장끼타령’의 비극과 풍자

눈 덮인 들판에 놓인 붉은 콩 한 알을 두고 벌어진 장끼와 까투리의 이야기, 그리고 판소리 열두마당 중 하나인 '장끼타령'의 유래와 전승 과정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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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촌의 매서운 겨울과 바닥난 양식

매서운 겨울바람이 산등성이를 훑고 지나가던 날이었지요. 양지촌 골짜기 바위틈에 보금자리를 튼 장끼와 까투리 부부의 집에는 서글픈 한숨 소리만 가득했습니다. 열두 아들과 아홉 딸, 스물한 마리나 되는 어린 새끼들이 깃털을 바짝 웅크린 채 배가 고파 짹짹 울어 대고 있었거든요.

“여보, 어쩌면 좋소. 서대쥐에게 빌려온 양식도 어제부로 쌀알 한 톨 남지 않았으니 말이오.”

장끼가 꽁지깃을 파르르 떨며 탄식하자, 까투리는 어린 새끼들을 날개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눈보라는 멎을 줄 모르니 큰일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는 아이들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겠어요.”

새끼들의 가쁜 숨소리를 듣던 장끼는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날개를 퍼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지요. 산골짜기 덤불에는 더 이상 쪼아 먹을 풀씨 하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산 그림자가 들판을 덮치기 전에, 먹이를 찾아 저 아래 넓은 평지로 날아가 보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눈 내린 바위굴 속에서 새끼들과 함께 있는 꿩 부부

눈밭 위에 홀로 놓인 붉은 콩

세찬 바람을 뚫고 날아간 들판은 그야말로 새하얀 눈 세상이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위를 조심스레 헤매던 장끼의 눈이 문득 번쩍 뜨였지요. 하얀 눈구덩이 한가운데,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붉은 콩 한 알이 소복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여보! 저것 좀 보시오! 하늘이 우리 가족을 굶어 죽지 말라고 이런 복을 내리셨구려!”

장끼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목을 길게 빼며 콩을 향해 겅중겅중 다가서려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 뒤를 따르던 까투리의 발걸음은 뚝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까투리는 콩 주변의 눈을 유심히 살피더니 얼른 장끼의 날개깃을 물어당겼지요.

“잠깐 멈추세요, 여보! 어찌 이 넓고 거친 눈밭 한복판에 콩 한 알만 온전하게 떨어져 있겠습니까? 콩 둘레를 잘 보세요. 볏짚 부스러기가 어지럽고 사람의 발자국 같은 자리가 뚜렷하지 않습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눈에 파묻힌 풀잎 자국일 뿐인데, 배가 등가죽에 붙은 새끼들을 생각해서라도 당장 물어 가야지!”

장끼는 까투리의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발을 굴렀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고, 장끼의 마음은 먹이를 향한 조급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눈밭 한가운데 놓인 붉은 콩을 바라보는 장끼와 말리는 까투리

불길한 꿈과 팽팽한 고집

까투리는 물러서지 않고 온몸으로 장끼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지요.

“여보, 제 말을 허투루 듣지 마셔요. 간밤에 제가 몹시 불길한 꿈을 꾸었습니다. 난데없이 검은 구름이 몰려와 당신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푸른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숨이 막히는 흉몽이었어요. 저 콩은 필시 사냥꾼이 놓아둔 덫의 미끼입니다!”

그러나 장끼는 허탈한 헛웃음을 터뜨리며 까투리의 말을 거칠게 밀어냈습니다.

“꿈이란 본래 헛된 망상일 뿐이오! 선비가 과거에 급제할 꿈을 꾸어도 공부를 안 하면 낙방하는 법이고, 길몽이라도 가만있으면 밥이 절로 입에 들어옵디까? 지금 눈앞에 쌀밥 같은 콩이 있는데 무슨 해괴한 꿈타령이란 말이오. 당신이 먹기 싫다면 내가 먼저 먹고 새끼들에게 물어다 줄 테니 비키시오!”

“안 됩니다, 여보! 제발 한 번만 물러서서 주위를 더 살펴봐요!”

까투리가 애원하며 울먹였지만, 배고픔과 아집에 눈이 먼 장끼의 귀에는 그 어떤 간곡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장끼는 날개를 활짝 펴고 붉은 콩을 향해 부리를 냅다 내리꽂았습니다.

붉은 콩을 향해 부리를 내리꽂는 장끼와 말리는 까투리

덫의 굉음과 벼랑 끝의 선택

‘탁-!’

그 순간, 눈밭이 갈라지는 듯한 날카롭고 무거운 쇳소리가 들판을 뒤흔들었습니다. 콩 밑에 교묘하게 묻혀 있던 사냥꾼의 틀채가 튕겨 오르며 장끼의 멱을 단숨에 내리누른 것이었지요. 붉은 장끼의 깃털이 허공으로 흩날렸고, 장끼는 눈밭에 처박힌 채 퍼덕거렸지만 버둥거릴수록 올가미는 목을 더욱 세게 죄어왔습니다.

“아이고, 여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까투리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부리로 덫의 나무틀을 쪼고 당겨 보았지만, 가냘픈 부리로 굵은 덫을 풀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 멀리 마른 갈대숲 너머에서 거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요. 털모자를 푹 눌러쓴 탁첨지가 덫을 확인하러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끼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목소리로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까투리야…… 내 네 말을 듣지 않더니 기어이 덫에 치이고 말았구나. 상부 잦은 네 집에 장가든 것이 내 팔자라 탓하려 했건만, 결국 내 눈멂과 고집이 화를 불렀어…… 저기 사냥꾼이 오니, 어서 새끼들을 데리고 도망치렴. 날 구하려다간 너마저 죽는다……”

다가오는 탁첨지의 그림자가 눈밭 위로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까투리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지금 남편 곁에서 머뭇거리다가는 덤불 속에 숨어 있는 새끼들까지 모조리 사냥꾼의 손에 목숨을 잃을 판이었습니다. 까투리는 피눈물을 삼키며 결단을 내려야만 했지요.

사냥꾼의 덫에 걸려 넘어진 장끼와 멀리 다가오는 사냥꾼

눈물을 딛고 돌아온 양지촌

탁첨지가 덫에 걸린 장끼를 거두어 어깨에 둘러메는 동안, 까투리는 숨을 죽인 채 갈대 덤불 속으로 파고들어 새끼들을 날개 아래 그러모았습니다. 사냥꾼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까투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떨고 있는 아이들을 이끌고 어둑해진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지요.

양지촌 바위틈 보금자리로 돌아온 까투리와 새끼들은 장끼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목놓아 통곡했습니다. 까투리는 눈밭에 떨어져 있던 장끼의 붉은 깃털 몇 올을 정성스레 모아 바위 그늘 아래 묻고 남편의 넋을 기리는 조촐한 장례를 치렀습니다. 어린 새끼들도 어미 곁에 둥글게 모여앉아 작은 부리를 맞대며 슬픔을 나누었지요.

“아비의 잘못된 고집이 참혹한 결과를 낳았지만,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 추운 겨울을 다 함께 버텨내야 해.”

까투리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자, 새끼들은 어미의 품으로 파고들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습니다. 비록 지아비는 허망하게 잃었으나, 남겨진 가족들은 서로의 날개를 보듬으며 그 모진 눈보라와 엄동설한을 함께 견뎌내기 시작했답니다.

바위 그늘 아래에서 장끼의 붉은 깃털을 모아 슬퍼하는 까투리와 새끼들

장끼타령은 장끼와 까투리 등의 조류를 의인화하여 인간 세태를 풍자한 판소리 열두마당의 하나입니다. 조선 후기 판소리 공연에서 불렸으며, 송만재의 「관우희」와 이유원의 「관극시」에 그 제시가 전하여 대략 18세기 중엽에는 이미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판소리 창자로 염계달과 한송학 등이 유명했으나, 19세기 중후반경 판소리가 열두마당에서 여섯마당, 다섯마당으로 축소되는 과정에서 그 창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판소리 사설이 『쟝젼』, 『꿩전』, 『웅치전』, 『화충전』, 『화충션생전』 등 다양한 고소설과 민요, 가사 등의 형태로 분화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조선 중·후반의 시대적 현실과 윤리관 변화가 깊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조선 중·후반에 이르러 과부의 수절 개념이 흔들리고 상부한 여인들이 개가나 재혼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등 윤리관이 변모하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변화가 작품 결말의 수절과 개가 문제에 반영되었습니다. 또한 장끼 일가의 극심한 가난과 포수, 사냥개, 모리꾼, 보라매로부터의 위협은 조선 후기 피지배층인 농민이 직면한 현실과 위정자 및 관리층의 서민층에 대한 횡포와 수탈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장끼타령은 판소리 창 자체는 전승이 중단되었으나, 그 사설이 다양한 고소설과 민요, 가사 등의 문헌적 형태로 분화되어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전통 서사 문화와 판소리계 소설 연구의 중요한 자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서관 아카이브에 보관된 판소리 관련 전통 고문헌과 사설 자료

본문의 이야기에서 다루어진 장끼와 까투리 부부의 겨울 나기와 붉은 콩을 둘러싼 갈등, 장끼의 덫 사고와 탁첨지에 의한 수습, 까투리의 양지촌 복귀 및 장례 등은 판소리 및 고소설 「장끼타령」의 전승 줄거리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다만 눈밭에서의 구체적인 대화와 미세한 심리 묘사, 행동의 세부 사항 등은 문학적 상상력으로 창작된 영역입니다. 작품에 담긴 수절과 개가 윤리의 변화나 농민 수탈의 시대적 배경은 역사적 평가에 근거하며, 이본에 따른 결말의 다양성은 전승 양상 그대로 존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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