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이월 초하룻날 새벽, 문풍지를 흔들며 지상에 내려오는 바람의 신 영등에 얽힌 세시풍속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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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울기 전의 차가운 새벽바람
솨아아, 쏴아.
음력 이월 초하룻날 새벽 두 시, 아직 온 동네 닭들이 홰를 치며 울기도 전인데 거센 바람이 문풍지를 거칠게 흔들었습니다. 방 안에서 웅크리고 자던 순이는 문풍지가 부르르 떠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지요.
‘이월 초하룻날 새벽에는 영등신이 내려오신다고 했어. 남보다 먼저 우물물을 길어 올려야 복을 받는다는데!’
순이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영등신은 일 년에 딱 한 번 천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바람을 다스리는 신이었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이날 첫새벽에 남보다 먼저 길어 올린 정화수를 올려야 한 해가 평안하다고 입을 모으곤 했지요. 순이는 마당에 나가 누구보다 먼저 두레박을 채우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옷깃을 여미고 살그머니 방문을 열자, 매서운 바람이 순이의 코끝을 쨍하게 때렸습니다. 하늘엔 별빛만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고 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도르래와 우물가의 소동
순이는 털신을 끌고 후다닥 우물가로 달려갔습니다. 마을 안쪽에 자리한 우물에는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등이다!”
순이는 으쓱해하며 두레박 줄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물 위에 달린 나무 도르래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섣달부터 이어진 늦추위 탓에 우물틀과 새끼줄이 꽁꽁 얼어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어라? 왜 이래?”
순이가 끙차 소리를 내며 힘껏 줄을 당겼습니다. 그러자 얼음이 쩍 갈라지며 덜컹하더니, 그만 도르래에 묶여 있던 빈 박바가지가 튕겨 나가 우물 덮개 위를 데구루루 굴렀습니다.
달그락, 덜컹!
“아이고, 깜짝이야!”
순이는 제 발을 찧을 뻔하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쩔쩔매고 있는데, 등 뒤에서 나지막한 발소리와 함께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할머니의 등불과 목표의 전환
“새벽바람이 이리 사나운데, 웬 강아지가 우물가에서 뒹굴고 있누?”
등불을 손에 든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질러매고 품에는 작은 바가지를 소중히 안고 계셨지요. 순이는 화들짝 놀라 옷을 털며 일어났습니다.
“할머니! 저 영등물 일등으로 떠서 우리 집 복 받게 하려고 그랬는데요…… 도르래가 얼어서 줄이 안 풀려요.”
할머니는 큭큭 웃으시며 등불을 우물가 평상에 내려놓았습니다.
“욕심부려 서두르면 샘물도 놀라 숨는 법이다. 영등할미는 바람을 몰고 천계에서 내려오시는데, 물을 일등으로 긷는 재주를 보러 오시는 게 아니라 정성을 보러 오시는 게지.”
할머니는 품에서 따뜻한 물이 담긴 표주박을 꺼내 얼어붙은 도르래 축에 조심스럽게 부었습니다. 사르르 얼음이 녹으며 새끼줄이 스르륵 풀려나왔습니다. 순이는 문득 혼자서만 으스대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거친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 저 혼자 물 뜨는 거 그만둘래요. 할머니랑 같이 떠서 장독대에 올려요. 제가 도르래 잡을게요!”
순이는 일등이 되겠다는 조급함을 훌훌 털어내고, 할머니 곁에 바짝 다가섰습니다.

장독대에 차린 정갈한 맞이
두 사람은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순이가 조심스레 도르래를 늦추어 두레박을 깊은 물속으로 내리자, 맑은 물이 찰랑이며 차올랐습니다. 할머니와 순이가 함께 힘을 주어 길어 올린 첫 정화수는 티 없이 맑고 시렸습니다.
“옳지, 아주 맑구나.”
할머니는 물을 정성껏 동이에 채운 뒤 순이의 손을 잡고 뒤뜰 장독대로 향했습니다. 장독대 둘레에는 미리 쳐둔 금줄이 새벽바람에 파닥거렸고, 땅바닥에는 붉은 황토가 정갈하게 뿌려져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놋그릇에 맑은 물을 넘치지 않게 가득 담아 장독대 한가운데에 올렸습니다. 순이도 옆에서 정성껏 두 손을 모았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장독대를 휘감아 돌았지만, 이상하게도 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가슴속은 잔잔하고 따스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과 내일의 약속
이윽고 어스름이 걷히며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왔습니다. 이월 초하루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자마자, 마당 한구석의 싸리비가 기우뚱할 정도로 거센 바람이 한바탕 씽 불어닥쳤습니다.
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독대를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할머니, 바람이 정말 세게 불어요! 영등할머니가 정말 오셨나 봐요!”
할머니는 옷자락을 여미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초하룻날 바람이 이리 사납게 부는 걸 보니, 올해는 영등할미가 딸을 데리고 내려오셨나 보구나. 비가 오면 며느리를 데려와 옷을 적시게 하고, 바람이 불면 딸 데려와 치맛자락 흔들며 자랑한다고들 하지. 올해는 바람이 거세니 들판 곡식이며 일손을 단단히 살피며 농사를 지어야겠어.”
할머니의 담담한 목소리에 순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새벽의 소동과 거친 바람 속에서도 놋그릇에 담긴 물은 맑고 투명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순이는 달라졌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뒤뜰 장독대로 가 물그릇을 살피고 마당의 바람결을 가만히 헤아려보는 참하고 다정한 습관이 생겼답니다.

영등신앙과 바람의 신
영등은 바람을 다스리는 신으로 천계에 거처하다가 일년에 한 번 음력 이월 초하룻날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영등신은 지상에서 15일 또는 20일 동안 머물다가 천계로 돌아간다고 전해집니다. 음력 이월 초하룻날 바람이 불면 딸, 비가 오면 며느리를 데리고 온 것으로 여기며, 이날의 날씨에 따라 그해 생업의 풍흉을 점칩니다. 전남 신안과 제주도 지역에서는 이날 날씨가 좋고 장닭 꽁지가 팔랑거릴 정도로 바람이 불면 그해 생업이 풍요롭다고 믿습니다.
문헌에 기록된 영등 제의
『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 풍속조에는 이월 초하룻날 귀덕, 금녕 등지에서 장대 12개를 세워 신을 맞아 제사 지내고 연등 행사 및 승선을 금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동국세시기』 이월조에는 영남지방 집집마다 영등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무당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15일에서 20일간 사람을 꺼려 만나는 풍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역별 전승 양상과 풍속
지역에 따라 영등신을 맞이하는 풍속과 전승 양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경남 거제, 통영, 고성 등 지역에서는 영등할미가 세 사람이어서 10일에는 상등할미, 15일에는 이등할미, 20일에는 마지막으로 하등할미가 상천한다고 합니다. 경북지역에서는 영등날 새벽 2~3시쯤 닭이 울기 전에 영등신에게 올릴 우물물을 남보다 먼저 길어 오는 ‘영등물뜨기’ 풍속이 성행합니다. 한편 경북 청도와 경산 지역에서는 각각 정영둥이나 영동이라는 인물의 죽음과 관련된 유래 설화가 전해집니다.
해안지역의 영등제는 개별 가구 단위로 장독대나 부엌 살강 아래 등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서 임시 제의 장소를 마련하고 정화수와 제물을 올립니다. 특히 경남 남해안지역에서는 정화수를 올리기 위해 대나무나 소나무로 깔때기 모양을 만들어 세운 ‘물대’라는 특별한 장치를 마련하며, 해안형 제의에서는 밥이나 찌개를 그릇에 담지 않고 솥이나 냄비째로 올리며 가족 수만큼 숟가락을 꽂습니다. 통영지역은 명정동 충렬사 앞마당에서 합동 분신제(소지를 태워 올리는 것)를 지냅니다.
제주도에서는 영등신을 강남천자국 또는 외눈배기섬에서 온 존재로 구체화하고, 여성 신격 외에 남성 신격인 ‘영등하르방’을 섬기기도 합니다. 제주도의 영등신앙은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2월 1일 영등맞이굿과 그달 12일에서 15일 사이 배송굿을 치르며, 배송굿 말미에 ‘씨드림’과 씨점을 쳐서 풍흉을 점칩니다. 또한 제주도 애월리에서는 떼배에 말머리 모양을 만들어 비단으로 꾸미고 약마희를 하여 신을 즐겁게 했습니다.


영등신앙과 관련된 전통적 민속 양상과 문헌 기록은 전해지고 있으나, 오늘날의 구체적인 현대적 전승 양상에 대해서는 자료에 별도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순이가 새벽에 겪는 도르래 소동, 할머니와의 구체적인 대화와 심리 변화, 그리고 이후 매일 날씨를 살피는 생활 습관 등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창작된 허구적 요소입니다. 영등신이 음력 이월 초하룻날 하강하여 머문다는 신앙 사실, 닭이 울기 전 새벽에 물을 길어 올리는 ‘영등물뜨기’ 풍속, 초하룻날 바람과 비를 통해 풍흉을 점치는 전승, 그리고 장독대 주변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치며 정화수를 올리는 해안 및 가정 의례 양식은 실제 민속 자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관련 장소
통영 충렬사 앞마당
통영지역 명정동 충렬사 앞마당에서 합동 분신제를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