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5월 단오를 앞두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네를 매려는 둥이와 팥이의 이야기와 함께, 조선시대 민간에서 성행했던 그네뛰기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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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단오와 마을 어귀의 그네터
음력 5월 수릿날, 곧 단오 명절이 다가오면 옛 마을 어귀는 이른 아침부터 들썩이곤 했지요. 고려 적에는 이를 ‘추천’이나 ‘추천희’라 부르며 궁궐과 양반들이 호화롭게 즐기기도 했지만, 조선의 여염집 마을에서는 ‘근데’, ‘군데’, ‘근듸’라 부르며 남녀노소 누구나 어울려 타는 신명 나는 놀이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마을에서 가장 굵직한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그 아침, 청년 둥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동네 고샅길만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오지 않는 동무와 혼자 잡은 굵은 동아줄
“팥이 이 녀석, 해가 중천에 걸리도록 왜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야?”
둥이는 참다못해 마당 한쪽에 놓인 굵은 삼 동아줄 뭉치를 덥석 움켜쥐었습니다. 오늘 안으로 그네를 다 매어 시험해 보아야 내일 단오 겨루기에 나설 수 있을 텐데, 함께 발판을 다듬어 오겠다던 동무 팥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지요.
“에라, 기다리다 날 새겠다. 내 혼자라도 먼저 걸어두마.”
둥이는 삼으로 엮은 묵직한 줄을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느티나무 굵은 가지를 향해 사다리를 올랐습니다. 하지만 어른 팔뚝만 한 줄을 홀로 당겨 균형을 잡는 일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줄을 끌어올릴 때마다 매듭이 주르륵 미끄러져 흙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일쑤였지요.
거꾸로 매달린 발판과 진땀
한참을 낑낑거리던 둥이는 겨우 나뭇가지에 줄 두 가닥을 둘러매고는, 땅바닥에 뒹굴던 나무판자 하나를 주워 서둘러 밑싣개로 묶었습니다. 발로 딛고 설 밑싣개, 곧 발판이 단단해야 하늘로 솟구칠 수 있는 법이었지요.
“휴, 이제 좀 그네 꼴이 나는구나!”
땀을 훔치며 줄을 잡고 조심스레 올라서는 순간, 널빤지가 기우뚱하더니 거꾸로 휙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둥이는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하며 겨우 기둥을 붙잡았지요. 양쪽 줄 매듭의 높낮이가 어긋난 데다, 발판 홈을 거꾸로 꿰어 줄이 겉돌았던 것입니다.
“아이고, 이게 왜 이 모양으로 매달렸담…….”
둥이가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진땀을 뻘뻘 흘리던 바로 그때였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팥이의 숨겨진 사정
“둥이야! 둥이야, 미안하다!”
저 멀리 언덕배기에서 팥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팥이의 양손에는 잘 깎은 단단한 나무 밑싣개 하나와 무명천 두 줄이 들려 있었지요. 얼굴은 온통 땀과 톱밥 범벅이었습니다.
“너 여태 어디서 빈둥거리다 이제 오는 거야? 나 혼자 줄 매려다 골병들 뻔했다!”
둥이가 쏘아붙이자, 팥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이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빈둥거리긴 누가! 어제부터 밑싣개 양쪽에 줄 홈을 파는데, 자귀질이 서툴러 나무를 두 짝이나 쪼개 먹었단 말이다. 밤새 새로 깎고 다듬느라 이제야 가져왔지. 너 혼자 묶은 저 꼴을 보니…… 너도 만만치 않게 헤맸구나?”
거꾸로 덜렁거리는 둥이의 발판을 본 팥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둥이 역시 무안한 듯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지요.

머리를 맞대고 묶는 안전줄과 밑싣개
“혼자 잘난 척하다간 내일 단옷날 창피만 당할 뻔했네. 어서 다시 하자.”
둥이가 손을 내밀자 팥이가 씩 웃으며 일어섰습니다. 둘은 엉성하게 묶였던 줄을 풀어내고 다시 차근차근 손을 맞추었습니다. 한 사람이 사다리 위에서 줄 길이를 팽팽하게 맞추어 잡으면, 다른 사람이 아래에서 밑싣개의 홈에 삼줄을 꼭 맞물려 야무지게 매듭을 지었지요.
“손목을 받쳐줄 무명 안전줄도 잊지 말고 달아야 해. 바람을 타다 손이 미끄러지면 큰일 나니까.”
팥이가 품에서 꺼낸 무명천을 둥이에게 건넸습니다. 양손을 단단히 지탱해 줄 안전줄까지 묶고 나니, 마침내 흔들림 없는 의젓한 그네가 완성되었습니다. 혼자 끙끙 앓을 때는 그토록 애를 먹이던 줄이, 둘이 힘을 보태니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반듯하게 걸린 것이었지요.

허공으로 솟구친 첫 그네와 날아간 짚신
“자, 다 맸으니 어디 한번 타 볼까?”
둥이가 먼저 성큼 올라서서 무명 안전줄에 손목을 꿰고 줄을 꽉 쥐었습니다. 팥이가 뒤에서 힘껏 그네를 밀어주자, 둥이는 무릎을 굽혔다 펴며 힘차게 발을 굴렀습니다.
‘쏴아아-’
단오 앞둔 신록의 바람을 가르며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습니다. 느티나무 잎사귀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지요. 가슴이 뻥 뚫리는 해방감에 둥이가 신이 나서 다리에 힘을 바짝 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으랏차차!”
너무 세게 발을 찬 나머지, 둥이의 발에 헐렁하게 걸려 있던 짚신 한 짝이 허공으로 훌렁 벗겨져 날아가 버렸습니다. 짚신은 포물선을 그리더니 느티나무 높은 곁가지 틈새에 턱 하니 걸려 대롱대롱 춤을 추기 시작했지요.
신록의 가지에 걸린 웃음
그네가 잦아들고 둥이가 맨발 한 짝으로 땅에 내려서자, 팥이는 배를 잡고 뒹굴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하! 둥이야, 그네를 뛰랬지 신발 자랑을 하랬냐? 저 높은 데 걸린 걸 어찌 꺼낸담!”
“웃지 마라! 내일 단오 겨루기 때 꼭대기까지 솟구쳐서 내가 직접 발로 걷어찰 테니까 두고 봐!”
둥이도 제 맨발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장대를 가져와 보았지만 짚신이 걸린 가지는 너무 높아 닿지 않았지요. 결국 둘은 나무 위에 걸린 신발을 올려다보며 서로의 땀 젖은 얼굴을 마주 보고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혼자 끙끙대며 속을 끓이던 아침나절의 조급함은 바람결에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답니다.

단옷날 바람을 가르는 호쾌한 비상
드디어 오월 단옷날 아침, 온 동네 사람들이 울긋불긋 옷을 차려입고 느티나무 그네터로 모여들었습니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은 처녀들도, 힘을 겨루러 나온 젊은 장정들도 저마다 차례를 기다리며 응원을 보냈지요.
둥이와 팥이의 차례가 되자, 두 청년은 튼튼하게 매어진 삼 동아줄을 잡고 당당히 나섰습니다. 팥이가 밀어주고 둥이가 몸을 솟구칠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푸른 하늘을 가르며 높이 치솟던 둥이가 나뭇가지 끝에 이르렀을 때, 바람결을 탄 그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연습 때 걸려 있던 짚신짝이 툭 하고 떨어져 팥이의 품 안으로 쏙 안겼답니다.
“와하하, 저것 좀 봐라!”
구경꾼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온 마을에 메아리쳤습니다. 둥이는 바람을 가르며 하늘 높이 웃었고, 팥이는 떨어진 짚신을 번쩍 들어 보이며 활짝 웃었지요. 참으로 기특하고 신명 나는 단오의 하루였답니다.
그네와 명칭의 변천
그네는 중국 사료나 고려시대에 ‘추천(鞦韆)’, ‘추천희(鞦韆戲)’라 불렸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근데’, ‘군데’, ‘근뒤’, ‘근듸’, ‘근의’, ‘그리’, ‘구리’ 등의 우리말 방언으로 불렸습니다. 그네뛰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느 때부터 단오 명절에 즐겨 놀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음력 5월 단오를 중심으로 남녀노소가 즐긴 대표적인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젊은 여인들이 주로 즐겼으나 사월초파일이나 추석에 행하는 경우도 많았고, 젊은 남자들도 함께 타며 즐겼습니다.
역사적 기능과 계층별 양상
고대 그네뛰기는 일반 민중의 체력 단련으로 이용되었으나, 고려시대에는 귀족 통치 계급의 호화스럽고 성대한 귀족놀이로 발전하여 왕실과 신하들이 비용을 들여 행사를 치렀습니다. 고려 현종 때 사신 곽원이 단오에 추천놀이를 한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 최충헌전과 최이전 등에도 궁중이나 상류 사회에서 그네를 매고 잔치를 베푼 기록이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민간 차원의 겨루기놀이로 기능이 변화하였습니다. 유교적 윤리관을 중시한 조선시대 양반층은 젊은 여자들이 공중에 전신을 드러내는 그네를 체통에 어긋난다고 여겨 멀리하고 단속하였으나, 민간에서는 단오놀이로 굳어져 성행하였고 남녀가 눈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구조와 지역별 풍속
그네는 커다란 소나무나 느티나무 가지에 볏짚이나 삼으로 엮은 동아줄을 매고, 줄 맨 아래 끝에 밑싣개(발판, 앉을깨)를 달아 타는 놀이기구입니다. 평지에 두 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에 나무를 가로질러 매달거나 색헝겊으로 장식한 ‘땅그네’ 형태도 있었으며, 두 손목을 지탱하는 무명 안전줄을 달기도 했습니다. 15세기 한양 사람들은 단오 명절에 종로 네거리 뒷골목에 그네터를 설치하고 남북 두 패로 나누어 내기를 하였으며, 조선시대 중기 개성 송악산에서는 단오굿을 벌일 때 대왕부인이 그네를 뛴다고 하여 목상을 들어내어 그네 뛰는 시늉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속신에 이어 그네를 뛰면 부부가 화합하고 아이를 낳으며 무병장수한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남녀가 다투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해방 뒤 오월단오에 맞춰 전국 단위에서 민간단체 주관으로 그네뛰기가 부활하였으며, 서울 남산·장충단공원·사직공원 등에서 대규모 그네뛰기대회가 개최되고 각 지역 축제에서 행사가 펼쳐졌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세시풍속으로서 그네뛰기가 대규모로 펼쳐지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여성 행사나 지역 축제 부대 행사, 혹은 어린이들의 평상시 놀이 형태로 명맥이 잔존하고 있습니다.

단오 명절에 행해진 그네뛰기 풍속, ‘근데’ 등의 방언 명칭, 삼 동아줄과 밑싣개 및 무명 안전줄의 구조,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층의 단속과 민간의 성행 양상은 문헌과 조사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반면 청년 둥이와 팥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여 그네를 매다 겪는 좌충우돌 소동과 해프닝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창작된 허구이므로, 이를 역사적 사실이나 그네의 기원으로 혼동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